내 방에 작은 창이 있다. 커튼 없는 맨 유리창이다. 압정 두 개면 거기를 빛 고운 닥종이로 가릴 수 있는데. 서랍 안에 압정들이 흩어져 뒹구는 광경이 눈에 선하지만, 그건 옛날 옛적 서랍이다. 지금 내 서랍에는 압정이 없다. 대신 스카치테이프가 있다. 무언가 간단히 임시로 붙여놓을 때 스카치테이프를 쓴다. 압정으로 처리하는 게 훨씬 깔끔하고 야무진데.
국어사전에서 '압정'을 찾아보니 '손가락 끝으로 눌러 박는, 대가리가 크고 납작한 짧은 쇠못'이라고 나와 있다. 대가리가 뭐야, 대가리가. 사전에서 대가리를 찾아본다. '<머리> 의 속된 말' '짐승의 머리' '길쭉하게 생긴 물건의 앞부분이나 꼭대기'다. 머리>
그러니까 대가리는 짐승과 물건을 의인화해서 비하한 말이다. 아닌가? 대가리란 말이 따로 먼저 있었고, 그걸 사람에게 쓰면 속어가 되는 건가? 어쨌든, 사람의 격을 높인다고 짐승과 물건에 상스런 말을 따로 만들어 쓰는 건 좋지 않은 것 같다.
반짝반짝 머리 큰 압정. 그림이나 생활 계획표를 붙였다 뗄 때, 데굴데굴 굴러 책상 밑에 숨고 방바닥 멀리 달아나기도 했지. 그 압정 밟아 발꿈치에 박히면 비명, 비명 지르며 펄쩍 뛰었지.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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