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중심의 한국 근ㆍ현대 예술사의 한계를 ‘기억’을 통해 극복한다는, 그럼으로써 주류 예술사 바깥의 풍경들을 보완ㆍ복원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이다. 2003년 시작된 이 사업이 문화계 원로 91명에 대한 작업을 끝내고, 중간 결산의 의미로 2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내 아르코예술정보관에서 세미나를 연다. 그 주제가 <‘기억’의 예술사료적 가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20세기말 이후 역사의 객관성과 과학성의 신화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 대안적 인식ㆍ방법론으로 떠오른 게 ‘기억’이다. 이번 작업 역시 구술자가 기억을 통해 자신의 예술과 삶을 말하고, 전문연구자가 이를 채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구술 사료는 음성과 영상, 채록 문건 등으로 정리돼, 연구자나 일반인이 열람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가령, 구술자로 나선 김남조(79) 시인은 이번 작업을 통해 문단에 알려지지 않은 비극적인 가족사, 부군인 김세중 현대미술관 초대관장에 대한 기억 등을 술회했다. 김종길(80) 시인은 문단활동에 대한 일반 기록의 오류 등을 수정하고, 등단시절과 초기 영어영문학회 활동, 영문학자들이 한국 문학의 주류담론을 형성하던 시절의 이야기 등을 이야기했다. 이들 사료는 시인의 개인적 문학세계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인 동시에, 우리 문학사 연구에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세미나는 문학ㆍ공연예술ㆍ조형예술 등 20명의 부문별 구술채록의 대강을 살펴보고 임지현(한양대 역사학) 교수 등이 ‘기억과 상상의 사료적 가치’를 주제로 종합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역사라는 게 ‘메타 내러티브’, 가령 국민국가 성립ㆍ발전과정에 꿰어 맞추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배제하는 것이라면, 기억은 ‘메타 내러티브’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 인식의 민주화라 할 수 있다. 다만 기억 역시 이데올로기나 시대의 헤게모니적 담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회적 프레임의 영향을 받는다. 기억을 통한 역사 연구의 성패는, 그러므로 프레임화한 기억과 프레임 바깥의 기억 간의 긴장관계에서 비롯될 것이다.”(임지현 한양대 교수)
예술위는 이날 세미나에서 지적된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수용,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갈 방침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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