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에? 헌재소장 임명철회 "굴복"또 승부수? 탈당→중립내각 결심했나
노무현 대통령은 28일 “임기를 다 마치지 않는 첫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와대 국무회의 석상에서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말이다.
노 대통령은 회의에 앞선 모두 발언에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정치적 자산은 대통령직과 당적 두 가지뿐”이라며 이같이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또 “당적을 포기하는 상황이 오면 당적을 포기하는 네 번째 대통령이 되는데 아주 불행한 일”이라며 “가급적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지만, 그 길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와 함께 “어제 대통령이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철회한 것은 굴복”이라며 “대통령 인사권이 사사건건 시비가 되고 있어 권한행사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전 내정자 지명을 철회한 노 대통령의 심경은 참담해 보인다. 노 대통령은 이날 ‘굴복’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다. “굴복한 것이죠. 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대통령이 굴복했습니다.” 특히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이라는 대통령직과 당적을 모두 던져버릴 가능성까지 시사한 대목에선 극단적 무력감, 자괴감이 느껴진다.
이에 대해 청와대 윤태영 대변인은 “대통령의 심경과 각오를 얘기한 것”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하야 또는 열린우리당 탈당이 현실화할 가능성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그만큼 대통령의 처지가 엄중하다는 뜻이다. 노 대통령의 거취 언급은 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던 때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 임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언급을 공개적으로 한 것은 국가 최고지도자답지 않다는 비판을 부른다. “대 국민 협박을 하는 것이냐”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노 대통령 발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심경 뿐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할 것인지 노 대통령의 구상을 헤아리는 이들도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자신이 낭떠러지 벼랑 끝에 몰려 있음을 공표한 셈이다. 이는 일부 지지자의 재결집을 촉발할 수도 있다.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그랬다. 전 내정자 지명철회를 관철한 한나라당이 속도조절에 들어간 것도 이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둔 때문이다.
우리당 탈당은 최근 당청 관계에 비추어 시점이 문제이지, 노 대통령의 결심은 섰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르면 연내가 될 수도 있다. 다음 수순은 중립내각 구성이 될 전망이다. 결국 남은 임기 동안 여야를 초월한 행정부 수반으로서 ‘역사와의 대화’,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노 대통령의 지향점이라는 얘기들이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與 충격속 "이젠 결별 준비해야…"
노무현 대통령이 28일 탈당은 물론 대통령직 하야 가능성까지 언급하자 열린우리당은 충격 속에서도 '청와대와의 결별'을 준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당내에선 노 대통령의 '하야' 언급에 대해서는 특유의 솔직한 심정을 표현한 정치적 수사로 보면서도 탈당 문제에 대해선 "결국 외길 수순으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특히 이날 저녁 당의 공식 입장을 정하기 위해 열린 당 비상대책위 회의에서는 노 대통령의 탈당 문제가 처음으로 공식 거론됐다. 박병석, 김부겸 의원 등이 노 대통령의 탈당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서자 비대위는 "대통령은 정치를 당에 맡기고 국정에 전념해달라"고 요청하는 선에서 논란을 봉합하기로 했다. 노 대통령의 탈당 방안에는 공감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당이 대통령에게 직접 탈당을 요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밑바닥 정서는 더욱 강경하다. 유선호 의원은 "다들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라며 "이제는 독자생존의 모색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법적으로 원인 제공자인 청와대가 이혼 서류에 먼저 도장을 찍어야 한다" (정봉주 의원), "대통령이 탈당을 하겠다면 우리당이 기를 쓰고 말릴 이유가 없다" (우윤근 의원) '국민 여론을 따르고 당의 발전을 위해서는 (노 대통령의 탈당이) 필요한 것 아니냐'(문병호 의원) 등 노 대통령과의 절연 발언이 꼬리를 물고 있다.
특히 당내에선 노 대통령의 '자진 탈당' 언급으로 정계개편 논의에 탈출구가 뚫린 듯한 기대감마저 묻어 나온다. 통합신당으로 가는 길을 노 대통령과 동행할 지 여부가 마지막 걸림돌이었는데, 노 대통령의 탈당 시사로 당의 부담이 훨씬 줄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의원은 "노 대통령의 탈당은 책임정치의 측면에선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는 반가운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당 의원들은 노 대통령이 여ㆍ야ㆍ정 정치협상회의 구성 제안에 이어 탈당 시사 발언까지 당과의 협의 없이 한 데 대해서도 "당을 무시해온 노 대통령의 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친노 성향 의원들은 "비대위부터 해체해야 한다"(이화영 의원)며 노골적으로 당 지도부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어 노 대통령의 발언이 당의 분열에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신재연 기자 poet333@hk.co.kr
한나라당 "꼼수에 말려들라" 공식대응 자제
한나라당은 28일 노무현 대통령의 ‘중도 하차 가능성’ 발언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날 세우는 대응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당수 의원들은 사석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오기’의 소산으로 보면서 “대통령직과 관련된 발언을 너무 쉽게 한다”며 비판했다.
강재섭 대표는 “노 대통령이 독선과 오기를 앞세우지 말고 국민과 야당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남은 임기를 열심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고 박재완 비서실장이 전했다.
유기준 대변인은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이 임기를 잘 마치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해 ‘임기 중단 가능성’을 거론한 노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겨냥했다. 유 대변인은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국민의 소리에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인사를 객관적으로 하고, 국정을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말하는 등 대응 수위를 조절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이 노 대통령 발언에 대해“무책임한 국민 협박”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것에 비하면 한나라당의 공식 대응은 그리 거세지 않다.
한나라당은 현재의 판을 흔드는 어떠한 시도도 손해라는 계산을 하고 있다. ‘괜히 잘못 반응하면 노 대통령의 꼼수에 말려 들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하고 있다. 한 당직자는 “당으로선 노 대통령 발언에 대응하지 않는 게 최상의 수”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으로선 2003년 노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파동도 떠올랐을 것이다. 당시 “재신임을 묻겠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 한나라당은 “그러면 국민투표를 하자”고 덥석 받았다가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다만 이재오 최고위원은 이날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지금 모든 국민들이 대선을 빨리 치르자는 것 아니냐”며 “대통령이 그만 두면 대선을 빨리 치르면 된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각계 인사들의 고언
노무현 대통령이 28일 또다시 하야 가능성을 언급하자 각계 전문가 및 중진ㆍ원로들은 하나같이 충격과 우려를 금치 못했다. 이들은 노 대통령과 정치권의 정면 충돌로 민생이 더욱 뒷전으로 밀리는 상황에 대해 우려하면서 노 대통령의 당적 포기와 거국ㆍ중립 내각 구성 등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아울러 여당과 청와대 간 갈등 뿐 아니라 임기를 들먹이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심각한 국민 불안과 민심 이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대통령이 임기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그만두면 책임 회피"라며 "노 대통령은 모든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고 민생 문제에 전념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과오에 대한 보상"이라고 말했다. 이 전 의장은 "남은 임기 끝까지 더 이상 일을 벌이지 말고 지금까지 해온 일을 조용히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정치권과 노 대통령의 정면 충돌 양상이 탄핵 사태 직전의 상황과 흡사하다는 반응도 있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통령의 대응 강도가) 2004년 탄핵 사태 당시로 돌아간 느낌이며, 자의든 타의든 본인이 임기 도중 하야할 가능성을 거론한 것"이라며 "탄핵 때와 다름 없이 대통령의 발언이 양면적이고 협박 조라는 점이 주목된다"고 평했다.
그는 "한나라당과 외부에서 나를 압박하지 않는 한 대통령직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며, 더 이상 코너에 몰지 말라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코너에 몰 경우 그만둘 수도 있다는 경고의 뜻을 담았다는 해석이다. 불리한 국면을 일거에 반전시키려는 노 대통령 특유의 벼랑 끝 승부수의 성격도 짙다는 분석이다.
'탄핵의 주역'인 민주당 조순형 의원은 대통령이 취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심기일전해서 대통령 자신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며 "열린우리당과의 관계부터 복원해서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임기를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저히 집권당과 협력해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루빨리 탈당해 초당적 입장에서 야당과 국민에게 협력을 구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는 "노 대통령이 정치권과의 '치킨 게임'(한밤 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을 중단하지 않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번의 노 대통령 발언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국민 다수가 생각하는 대통령의 역할과 대통령 스스로의 인식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것"이라며 "전효숙 사태로 계속 대치하다 여기까지 오고 도저히 안되니 접고, 접고 나니까 못해먹겠다는 식으로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남은 임기에는 이미 해온 일들을 정리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과 교수는 "헌법에 자진 사퇴를 금지하고 있진 않지만 리더십의 부재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며 "국민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정도"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대통령의 발언에 깊은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협조를 하지 않고 흔들고 몰아세우는데 대한 불만 표시인 것 같다"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사퇴한다면 큰 국가적 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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