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를 둘러싼 수많은 고정관념에도 불구하고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에게 모차르트는 몬테베르디나 바흐처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작곡가다. 그런 점에서 아르농쿠르가 25일 첫 내한공연(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사람들이 기대했던 순수 오리지널 악기를 사용하지 않은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고전 관악기를 사용하면서 현악 파트에 바로크 활에서 현대적인 투르트 활까지 섞어 쓴 절충주의는 18세기 사운드의 색채를 유지하면서 큰 홀에 대응하려는 고육책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시작하고 그의 제자 쥐스마이어가 끝낸 <레퀴엠> 이라는 작품이 대전환기의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방법이 또 있을까? 레퀴엠>
아르농쿠르는 악기 하나하나보다는 모차르트의 메시지와 어법에 집중했다. 아르농쿠르는 <레퀴엠> 이 작곡자가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바로 그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들려주기 위한 수사법이 아르농쿠르 해석의 핵심이다. 모차르트는 가사와 음악을 철저하게 연관시켰기 때문에 아르농쿠르 또한 수사학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강력하게 강조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레퀴엠>
2003년 빈 실황 녹음과 비교해 볼 때 템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유지하되 표현은 더욱 풍부해졌다. 다이나믹의 예상치 못한 변화는 다양한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 광포함에서 지상에 내려온 신의 투쟁을 연상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천둥 같은 금관은 뒤통수를 후려치고 현악기는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있다. 독창자들의 연극적인 가창은 ‘투바 미룸’ 악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일치되고 초점이 또렷한 합창은 에너지를 마음대로 긴장시키고 이완시킨다.
또한 아르농쿠르는 ‘무음상태’의 가치를 재발견한 드문 지휘자다. 그는 몇몇 악장 사이에 의도적으로 긴 휴지를 두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를테면 ‘키리에’와 ‘디에스 이레’ 사이의 휴지는 자비와 분노 사이에 있는 심리적 간격을 상징하며 온갖 초조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아르농쿠르가 음악이 아닌 그림을 그렸다면 분명 거기에는 갖가지 상징과 알레고리가 가득할 것이다.
그것이 모차르트의 의도든 쥐스마이어의 의도든 간에 ‘레퀴엠 에테르남’과 ‘키리에’ 악장은 마지막 ‘룩스 에테르남’에서 반복된다. 육화한 신이거나 혹은 그의 평범한 제자거나 피할 수 없었던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은 마침내 고조되는 음조와 성스러운 화음 속에서 구원을 맞이한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죽은 자뿐만 아니라 지금 음악을 듣고 있는 산 자를 위한 시간이며 인간이 숭고해지는 드문 시간이기도 하다. 그 고요한 찰나조차 허락하지 못하는 박수와 환호와 플래시 세례가 우리를 다시금 구질구질한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만들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렇다. 결국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신이시여 저희를 궁휼히 여기소서. 아멘.
최지영 음악칼럼니스트(고음악 전문 홈페이지 www.AntiquEvangelist.com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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