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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39> 프리츠 비스너(1900~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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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39> 프리츠 비스너(1900~1988)

입력
2006.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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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등반사상 가장 많은 비난과 논란, 그리고 미스터리를 낳은 사건은 1939년의 K2 원정이다. 전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던 1939년 7월 19일의 늦은 오후, 미국의 K2 원정대는 세계 등반사상 가장 놀라운 기록의 달성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원정대장 프리츠 비스너(1900~1988)와 그의 충직한 고산 셰르파 파상 다와 라마가 해발 8,400m 지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비록 늦은 시각이었지만 날씨는 청명했고 프리츠의 컨디션 역시 최상이었다. 이제 불과 두 시간 정도면 인류 최초로 8,000m급 산의 정상에, 그것도 세계 제2위봉인 K2(8,611m)의 정상에 올라서는 역사적 쾌거를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때 그들이 정상에 올랐더라면 이후의 히말라야 등반사는 현재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실제로 인간이 8,000m 급 산의 정상에 올라서게 된 것은 그로부터 11년 후인 1950년의 일이다. 모리스 에르족이 이끌었던 프랑스 안나푸르나(8,091m) 원정대가 세운 기록이다. 이탈리아 원정대가 이룩한 K2 초등은 이로부터 다시 4년이 소요된다.

만약 1939년에 미국원정대가 K2의 정상을 밟았더라면 이 모든 이후의 기록들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을 것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후 미국은 히말라야 등반사를 좌지우지하는 최강의 산악대국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프리츠와 파상은 정상 등정을 포기하고 발길을 되돌리고 만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더욱 의혹을 부풀리는 것은 그 이후의 등반 기록이다. 하산 도중 프리츠의 아이젠은 파손되어 버렸다. 덕분에 꽝꽝 얼어붙은 얼음벽을 스텝 커팅(아이젠이 없을 때 피켈로 발 디딜 자리를 깎아내는 것)해가며 가까스로 귀환한 7,900m의 캠프9에서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떠한 식량도 장비도 남아있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프리츠와 파상은 필사적으로 캠프8로 철수한다.

하지만 7,500m에 설치된 캠프8은 더 가관이다. 텐트 문이 모두 열려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눈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장비와 연료통들은 눈밭 위에 내동댕이쳐져 있었으며, 침낭과 식량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때가 7월 22일이다. 거의 나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프리츠와 파상은 그대로 탈진하여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계속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당시 44세의 스키선수 출신 원정대원 더들리 울프는 캠프7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단지 몸뚱아리 하나로만 존재했을 뿐 그 어떤 식량과 장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프리츠와 파상은 그를 재촉해 함께 내려가자고 했지만 더들리에게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프리츠와 파상은 분노와 의혹 속에 필사의 하산을 계속한다.

하지만 캠프6에서 캠프2까지 모두 철수된 다음이었다. 그들이 베이스캠프까지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속한다. 프리츠는 베이스캠프마저 철수하려고 하던 부대장의 멱살을 잡고 다그치지만 돌아온 답변은 절망적이다. “당신들 모두 죽은 줄 알고 철수하는 중이었소.”

정상에 대한 재도전은 이미 물 건너 간 다음이었다. 원정대장 프리츠는 셰르파들을 다독여 캠프7에 남아있는 더들리의 하산을 도와주라고 위로 올려보낸다. 하지만 이때쯤에는 이미 기후가 돌변하여 폭풍설이 몰아치는 지옥이 펼쳐진 다음이다. 결국 캠프7의 더들리와 그를 구조하러 떠난 3명의 셰르파는 인간이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정상을 코 앞에 두었던 천국으로부터 4명의 사망자가 생겨난 지옥으로 급전직하하게 된 것이다. 1939년의 미국 K2 원정대는 그렇게 어이없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 이후 시작된다. 원정대장 프리츠의 실책에 대하여 비난과 논란이 빗발치게 된 것이다. 결국 미국산악회는 공식적인 진상조사단을 꾸려서 이 사건을 집중조사하게 된다.

지면관계상 이 흥미로운 논쟁을 상세히 전할 수 없어 아쉽다. 결론만 말하자. 1941년에 제출된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모든 책임은 프리츠 비스너에게 있다. 그는 공명심에 불타는 산악인이었을 뿐, 원정대의 단결과 조화를 등한시했고, 그 결과 참사를 빚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 후에 제출된 미국산악회의 공식 입장은 정반대의 견해를 밝힌다. 당시 K2 원정대는 오합지졸이었고, 대원들이 원정대장의 지휘를 거부했거나 묵살했으며, 오직 프리츠 비스너만이 용맹스러운 등반활동과 구조활동을 펼쳤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일까. 나는 1966년의 공식보고서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1966년의 공식보고서조차 침묵하고 있는 비밀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1939년의 원정대와 1941년의 진상조사단은 무능했고, 편파적이었으며, 위악적이었다. 그들은 독일 출신의 이민자가 미국 산악계를 대표한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나더러 사상 최악의 원정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1939년의 미국 K2 원정대를 들 것이다. 그들은 시쳇말로 ‘당나라 군사’였다. 그런 원정대를 이끌고 8,400m까지 오른 프리츠는 누가 뭐래도 당대 최고의 산악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원정 실패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 씌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독일인은 인류의 공적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진실을 알게 되면 입맛이 쓰다. 하지만 아름다운 후일담도 있다.

나는 언제나 왜 프리츠 비스너가 정상을 200m 남겨두고 뒤돌아 섰을까가 궁금했다. 만년의 프리츠는 담담하게 미소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당시의 나는 파상과 연결된 로프를 풀고 단독 등정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파상은 어두울 때 정상에 오르면 신(神)이 분노한다며 만류했다. 그는 나의 오랜 친구다. 나는 그런 친구와 연결된 로프를 풀어버릴 수가 없었다.”

1939년 미국 K2 원정대의 영웅담과 후일담은 깊은 울림을 갖는 이야기다. 당시의 원정대원들은 정말 후진 녀석들이었다. 정상공격조가 생환하기도 전에 모든 캠프를 철수해버린 그들의 만행은 자손 대대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당대 최고의 산악인을 무능력한 원정대장으로 폄하해버린 미국산악회의 공식 입장은, 아무리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고 해도, 유치하고 파렴치한 짓거리였다.

그들이 1966년에 이르러서야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프리츠 비스너를 종신 명예회원으로 추대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은 프리츠 비스너다. 그는 자신의 친구였던 셰르파를 위하여 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을 대업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포기해버렸다. 명예보다는 우정을 더욱 높은 가치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 팔순에도 선등 즐긴 美 등반의 아버지

프리츠 비스너는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20세기 초반 유럽의 자유등반을 이끌었던 위대한 클라이머였다. 그는 12세 때 이미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2,962m)에 올랐으며, 20세 때 돌로미테에서 5.11급의 루트를 개척해냈다. 당시 미국의 암벽등반 수준은 5.7급이었다. 프리츠는 1929년에 뉴욕으로 이주했으며, 1935년에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이후, 북미 전역에서 놀라운 초등 기록들을 대거 수립했다.

프리츠는 ‘미국 현대등반의 아버지’다. 그는 유럽에 비하여 20년 이상 뒤떨어져 있던 미국의 등반문화를 일거에 끌어올린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의 초등 기록들 중에는 코네티컷의 래기드 산, 뉴햄프셔의 캐논 클리프, 와이오밍의 데블스 타워, 브리티시컬럼비아의 워딩턴 산 등이 포함된다. 뉴욕의 샤왕겅크스를 처음 발견하고 그곳에 다양한 고난도 암벽루트를 개척한 것도 바로 프리츠 비스너였다.

1939년의 K2 원정과 그 이후의 ‘마녀재판’에서 깊은 상처를 받은 그는 이후 공식적인 산악계와 히말라야 등반계로부터 발길을 끊고 ‘보다 개인적이고 작은 등반’에 심취했다. 40대 이후의 그는 주로 샤왕겅크스에서 고난도 단독 등반을 즐겼는데, 만년에 이른 팔순의 나이에도 대부분의 루트를 선등하여 후배 산악인들을 놀라게 했다.

산악문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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