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글을 쓰면서 정권과 정부라는 표현을 무차별, 무분별하게 혼용해왔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분명한 기준과 잣대에 따라 적절하게 그 어휘를 배열해왔다고 말할 수도 없어 솔직히 겸연쩍다.
하지만 최근 글과 말로 각각 접한 두 가지 경우를 통해 이 문제를 되돌아보게 된 것은 여러 모로 유익했다. 두서없고 염치없는 갖가지 정책에 이골이 난 많은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 가족과도 괴리된 '정책기술자들'
첫째는 본보 박래부 수석논설위원이 10월31일자 칼럼에서 "정부를 폄하하거나 정통성을 부인하는 표현인 '정권'을 노무현 정부 들어 언론들이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보도용어의 정명(正名)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곱씹어볼 만한 의견을 제시해준 것이다.
강 교수는 이달 8일자 칼럼에서 "정부를 지배하는 정치권력을 뜻하는 '정권'의 선의적 용법을 구제해 유연하게 쓰자"고 제안하면서 "정권이라는 표현을 자제하기보다 오히려 '정부의 정권화'에 주목해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정권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써야 한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형식적ㆍ행정적 개념인 '정부'보다 내용적ㆍ정치적 개념인 '정권'을 더 선호하는 이유로 "정부를 구성하는 관료사회에선 소신과 책임감보다 충성과 아첨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게 여전히 상식으로 통용돼 늘 정부보다는 정권이 두드러지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권핵심부에 줄이 닿느냐 여부에 따라 관료의 고속승진과 불이익이 갈리고, 정치인들도 대통령 권력의 흥망성쇠에 따라 몸을 굴리는 '지도자 추종주의' 행태가 노무현 정권에서도 익숙한 풍경이라는 것이다.
박 위원의 글보다 강 교수의 글을 더 길게 인용한 것은 특별한 편향이 있어서가 아니라 최근 만난 경제부처 고위공무원의 하소연을 전하고 함께 고민해 보기 위해서다. 그는 "언론이 정부와 정권을 한통속으로 싸잡아 흔드는 바람에 나름대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만든 정책도 취지나 의미를 채 전달할 새도 없이 묻혀버리거나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구체적 사례로 고령화ㆍ저출산에 대비한 '비전 2030'과 국토균형개발 로드맵, 비과세ㆍ감면을 줄이는 재정개혁 등을 거론한 뒤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이들 정책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애써 설명했더니 공감은커녕 '아빠는 그 자리에 있으니 그렇게 말하지…' 라고 반응하는 것을 보고 자괴감마저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언론이 정부를 여론 혹은 국민의 대척점에 두고, '세금만 축내는 무능한 조직' '코드만 살피는 소신없는 기술자 집단'이라고 몰아붙이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분별을 당부했다.
그의 요청은 절실했지만 나도 그의 아들처럼 시큰둥하게 대했다. 그러나 개운치는 않았다. 자의적인 혁신의 잣대로 관료사회를 조련해온 참여정부에서 조직의 '권력 추종주의'가 심화된 것은 분명하다 해도, 정권의 등쌀에 가뜩이나 주눅든 관료사회 전체를 언론이 도매금으로 매도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물론 강 교수의 지적처럼 '정부의 권력화'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고, 출세욕에 눈먼 일부 고위 관료들이 정권의 전위대처럼 행세한 책임은 물어야 한다. 공무원을 공복의 사명감보다 철밥통의 직업으로 대하는 풍조도 고쳐야 한다.
● 치국의 자부심으로 독립 선언을
하지만 엘리트집단이 모여들어 치국(治國)의 지혜를 짜내야 할 공직사회가, 떠나고 싶은 사람들로 넘치고 존재의 피로감으로 가득찬 조직이 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항상성과 안정성을 지녀야 할 정부가 정권의 설익은 실험에 놀아나고, 그 결과 정책마저 오염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이제 끊어야 한다. 쉬운 작업은 아니다.
정권의 절제와 공직사회의 쇄신, 언론의 균형감과 여론의 신뢰가 모두 모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못하면 저출산ㆍ고령화 해법, 연금 개혁, 성장동력 창출 등 국가적 과제는 재앙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고위공무원이 박 위원과 강 교수의 글을 봤다면 '정부를 정권에서 독립시켜라'라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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