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만큼이나 우울하다. 정치든 경제든 우리 사회의 어느 분야를 돌아보아도 침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 틈을 이용이나 하듯 새로운 권력의 꿈에 부푼 행진은 자못 힘을 받고 있다. 정부와 출발을 함께한 여당도 마찬가지다. 이제 마지막 탈출구는 오직 결별과 새 결속의 상대를 분명히 하는 방법뿐이라는 식이다. 그 움직임을 관찰하는 시민들의 심경도 대체로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 정부를 무시만 할 수 있나
지금의 정치, 현재의 정부, 시행중인 정책은 무조건 실패로 간주하고 비판은 일상화됐다. 지금까지 원칙적 입장에서 지지해 오거나 결정적 비난을 자제하던 사람들까지 한계에 도달했다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향후의 정세 변화에 은근히 기대를 싣는다. 짓밟힌 희망의 싹이 움틀 가능성이 있는 곳은 오직 거기밖에 없지 않느냐는 듯하다.
그렇다면 좋다. 지금 우리의 사정이 대체로 그러하다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현실을 토대로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그런 방식으로라도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현재 진행 중인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 작동중인 정권과 정부는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의 대세적 기류의 표현대로라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현 참여정부는 임기종료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라는 것이다. 무언가 적극적으로 나서면 더 방해만 되고 일을 그르치기만 할 뿐이니, 가만히 있기만 해 달라는 말이다. 토론이라도 하자면 드러내 놓고 그렇게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만, 미묘한 기류 속에 그런 의도는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 조금만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가. 설사 현 정부에 대한 진단이 꽤 정확하다 할지라도, 존재하는 인물과 기구와 권한을 식물로 간주하고 진행하는 새 살길 찾기란 것이 성공할지 의문이다. 실책을 확인하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그 실책과 비난을 딛고 견고히 일어서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분명한 현실을 무시하고 어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감시와 비판은 아무리 매섭고 날카로워도 상관없지만, 그 성찰의 결론으로 펼칠 새 장은 현실을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지금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잡았다는 실마리를 제대로 풀 수 있겠는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헌법재판소장은 어디로 실종됐는가? 헌법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오히려 헌법 작용을 혼돈의 도가니 속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을까. 굳이 특정 정당을 거명하고 싶진 않지만, 선택한 사례가 그러니 한나라당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작에는 실수가 있었다. 그것이 헌법적 실수든 법률적 실수든 모두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 실책이 반드시 절대적인 것인가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문제를 새삼 따질 필요는 없겠다.
임기 중간의 헌법재판관을 사퇴하게 하고 다시 임명하는 것은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의 임명권을 빼앗아 행사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위헌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은 좀 궁색하다. 대통령이 고의로 그렇게 했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작동을 장기간 파행으로 몰고 가면서까지 할 수 있는 주장은 아니다. 국정의 매사를 헌법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도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지엽적 헌법 해석론을 펼치며 정치 공세의 무기로 삼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방식을 극단화하면 우리나라에 법은 헌법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이나 마찬가지다.
여야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그러나 그 의연한 태도에는 착오가 있다. 모든 규범적 문제를 헌법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다. 헌법이면 만능이란 사고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영역까지 사법부의 권한에 맡기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가장 긴요하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정부를 포함한 여야의 정치력이다. 원만한 정치적 타결은 때론 헌법보다 더 유용하다. 그런 고도의 기술을 보여 줄 때 국민이 발견하는 희망은 더 분명해질 수 있다.
차병직 변호사ㆍ참여연대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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