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열기의 정점에 발표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유장한 성명서는 이렇게 이어진다.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수립합시다.…함께 누릴 빛나는 새 세상이 목전에 임박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0년. ‘새 세상’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계간 <황해문화> 겨울호가 ‘87년 혁명 그 후 20년’ 특집을 마련했다. 세칭 ‘386세대’로 분류될 소장 학자들이 나서 “지난 20년의 희망과 환멸을 냉정하게 돌아본” 것이다. 황해문화>
박상훈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민주화 20년,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 전환이 필요한 이유> 라는 글에서 국본의 성명서를 인용하며, “이 성명서를 낭독했던 인명진 국본 대변인이 현재 한나라당 윤리위원회 위원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민주주의의 슬픈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고 적고 있다. 박 교수 뿐 아니라 필진 모두가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는 형식적ㆍ절차적 민주주의일 뿐이며, 과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형성된 계층구조, 경제체제, 국가-이데올로기 구조 등 사회 구성의 주요 내용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민주화>
이들은 과거 민주화 운동 세력들이 잇달아 제도권 정치현장으로 진입했고, 현 정부 들어서는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 뜻과 힘을 다른 세력에게 위임함으로써 주체의 공동화를 낳았다고 본다. “현 참여정부의 집권 주체세력이 보수세력과 관료세력에게 역으로 포섭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비전과 과제가 아닌, 보수세력, 전문관료세력의 비전과 과제를 내면화”(김선혁 <참여정부의 혼돈, 진보의 위기, 그리고 한국민주주의의 미래> )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민주화 운동 주체들의 제도권 진입과 변질이 사회 개혁을 위한 대중적 힘의 결집 가능성을 소진시켰고, “차세대 엘리트 배출의 독점적 채널이었던 대학마저 이 같은 사태 변화를 선도하는 거대기구로 전락”한 지금, 필자들이 제기하는 대안은 ‘정당 민주주의’(party democracy)다. “운동적 요소를 정당 조직으로 전환시킨 대중 정당”, 지금까지의 정당과 “종류가 다른 정당”이 필요하며, “이를 조직하는 일은 87년 항쟁에 이어 ‘제2의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될 만한 중대 과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치적인 것=운동의 비순수성’이라는 진보파의 도덕주의적 정치관을 극복해야 하며, 민주화 세력이 주로 의존했던 전략도 사회운동에서 정당운동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요컨대 현재의 부실한 정당 정치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민주파의 정치세력화를 새롭게 과제화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이들은 비판적이다. 민노당 역시 “교육 받은 중산층의 정치관이 지배하는 엘리트 정당”(박상훈)일 뿐이며, “80년대를 대변할 뿐, 21세기를 대변하지 못하”(김정훈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연구교수)고 있다는 것이다.
<황해문화> 김명인 편집주간은 “특집 필자들이 민주화 세력에 의한 대중적 정당 정치의 복원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그 기본강령, 즉 희망을 꿈꾸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납득하고, 합의하고, 헌신할 수 있는 공동의 이념에 대해서는 괄호를 치고 있다”며 “이는 방법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으나 이념적 대안은 여전히 불투명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황해문화>
<황해문화> 측은 내년 봄호에 같은 테마의 2차 기획을 통해 87년 이후 20년 동안 이룬 것과 남긴 것, 이 시기에 진행된 국내 및 세계사적 격변의 현재적 의미 등을 고찰할 계획이다. 황해문화>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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