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왕 세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 의 주인공. 리어왕>
우리 같으면 보통 사후에 자식들에게 물려줄 유산을 생전에 미리 나눠주는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결국 자식들을 다 잃고 자신도 비통한 나머지 숨을 거두게 된다. 그 자신이 왕이므로 리어는 상속세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왕국을 셋으로 쪼개놓고 딸들에게 자신에 대한 애정의 크기와 깊이를 말해보라고 시키지 않았어도 충분했던 것이다. 리어의 두 번째 잘못은 공자의 가르침을 몰랐다는 것이다. <논어> 를 시작해서 100자를 넘기지 않은 곳에서 공자는 “교언영색에는 인이 적도다(巧言令色, 鮮矣仁)”라고 했고, 또 그 앞 대목에서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역시 군자답지 않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말했다. 논어>
여기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돈 많은 부모를 향한 애정 표현에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체내의 변화한 물리화학적 성분 때문에 쉽게 격분하거나 성급한 결정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늙은 부모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 과묵하거나 평범한 언행을 취하면, 특히 부모가 돈이 아주 많은 경우에는 쓸데없이 자만심(pride)을 드러내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리어의 세 번째 잘못은 경제력도 없는 주제에 계속해서 100명의 시종을 거느리는 식의 과소비 생활을 원했다는 것이다. 자식에게 얹혀사는 주제에 시종을 100명씩이나 거느리려고 했던 것은 누가 봐도 잘못한 일이다.
비록 ‘돌림빵’을 놓기는 했지만, 시종들만 없다면 어쨌거나 자기 아버지를 모시려고는 했으니까 두 큰 딸들은 요즘 기준으로 엄연히 효녀들이다. 이에 반해 리어는 100명의 시종이 없는 삶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전혀 가치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작품 <리어왕> 은 정체성에 관한 희곡, 혹은 시극(詩劇)으로 이해될 수 있다. 리어가 계속해서 던지는 물음은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1막 4장)라거나 “인간이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3막 4장)라는 것이다. 정체성이란 나란 혹은 우리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리어왕>
못된 두 딸에 땅·권력 나눠준 왕의 처지가
두 黨에 표 몰아준 유권자의 처지와 비슷
물론,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결국 “삶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맥을 같이 한다. <리어왕> 에서 세익스피어가 내린 결론은, 인생에서 치명적인 잘못을 여러 번 저지른 경우에는 “이 터프한 세상의 고문대(the rack of this tough world) 위에서 오래도록 지체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5막 3장). 세익스피어의 결론을 사회학적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리어왕>
고령화 사회에서 경제력 없는 노인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고문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번역은 매우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것이지만, <리어왕> 의 교훈이 ‘가족의 화합’이라는 식의 유치원생 수준의 작품 이해나 감상보다는 훨씬 더 낫다. 리어왕>
이재현(이하 현) 안녕하세요? 제가 어려서 읽은 다이제스트 판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이었는데요.
리어왕(이하 리어) 아, 그건 한국 사람들이 고친 게 아니라 이미 17세기 중후반 신고전주의 시대에 테이트라는 친구가 내 막내딸 코딜리아와 눈 뽑힌 글로스터의 큰아들 에드가가 행복하게 결혼하는 희극으로 고쳐 놓았지. 1838년에 원형이 복구되기 전까지 무려 150여년 간이나 해피 엔딩 버전이 무대에서 공연되었다네. 그 버전은 숭고의 미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쌈마이’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
현 앗, ‘삼마이메’(三枚目)란 말을 알고 계시네요?
교언영색하는‘쌈마이 정당’ 퇴출시키고
셋째딸 코딜리아 처럼 진실한 정당 찾고파
리어 그건 일본 전통극 가부키 등의 출연자 일람표에서 첫 번째 관록 있는 주연 배우와 두 번째 여자 역할을 하는 미남 배우에 이어서 세 번째 등장하는 익살꾼 역할을 하는 싸구려 조연 배우를 가리키는 말 아닌가. 일본의 ‘쌈마이 배우’는 영국의 르네상스 연극에 자주 나오던 ‘바보’(fool, 광대)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거야. 내가 주연이었던 <리어왕> 에서 ‘바보’는 때로는 날 조롱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수께끼 같은 시나 대사를 내뱉는다네. 물론 fool이란 말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목이 졸려 죽은 내 불쌍한 딸 코딜리아를 부를 때 내가 쓰기도 했지만 말이야. 그러고 보니, <리어왕> 은, 보기에 따라서는, 주인공인 내가 스스로 바보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그려. 리어왕> 리어왕>
현 네에. 그런 식으로 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다 바보지요. 그런데 오늘 모신 이유는 작품 얘길 하자는 게 아니라 요즘 한국의 정치 현실에 관해서 대화해 보자는 겁니다.
리어 수신(修身)이나 제가(齊家)에 실패한 내가 어찌 치국(治國)을 논하겠나? 난 초장부터 오만하고 완고했던 탓에 마음의 눈이 멀어 비극적 결말에 도달했던 사람일세.
현 낭만주의 시대에 코울리지도 이미 ‘트릭’이라고 지적한 바도 있지만요, 딸들의 애정 고백을 듣기도 전에 이미 구체적으로 나라를 셋으로 나눠놓은 것부터가 문제의 출발이지요. 그랬다가 결국 큰 두 딸에게 코딜리아 몫으로 배정되었던 나머지 세 번째 땅도 나눠주게 되었던 것이고요.
리어 그게 한국의 정치 현실이랑 뭔 상관인가?
현 지난 대선과 총선 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 다수의 표를 나눠주었던 한국 유권자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거죠.
리어 주권자인 국민들이 정치적 교언영색에 속아서 주권을 두 당에게 허망하게 양도해버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로구만, 자네는.
현 제 인터넷 검색에 의하면, <리어왕> 에는 주권 내지는 통치권(sovereign)과 관련된 말이 딱 두 번 나오는데요. 한번은 1막 4장에서 “내가 누구인지…”라고 리어왕이 묻자 바로 광대가 “리어의 그림자”라고 받아치는 대목에서 광대의 대사와 관계없이 리어왕이 자신이 하던 말을 계속 이어서 “나는 그것을 깨우쳤어야 해. 왜냐하면, 통치권(sovereignty)과 지식과 이성의 표지에 의해서, 내가 딸들을 갖고 있다고 그릇되게 내가 설득당해야만 했었으니까 말이야”라고 할 때 하구요, 그리고 다음은 4막 3장에서 코딜리아를 만나기를 거부하는 리어왕의 심리 상태를 켄트 백작이 설명하면서, “최고의(sovereign) 부끄러움이 그를 그토록 팔꿈치로 밀쳐낸답니다”라고 할 때입니다. 리어왕>
리어 두 번째의 sovereign은 ‘주권자의’란 뜻도 가지니까 중의법인 셈이지. 그나저나, 자네는 자네 식으로만 해석하고 있는데 말이야…. 우선 sovereign이란 말은 17세기 초 영국의 어법과 용례에 따라 이해를 해야 할 것이고, 또 다수의 세익스피어 연구자들이 강조해 왔듯이 당시의 연극 실상이나 관행을 충분히 알고 난 다음에 작품 해석에 나서야지.
현 예, 아무튼요, 지금 한국 정치판이 너무 답답해서 하는 얘기지요. 한쪽에서는 선거를 통해 책임을 지는 정당정치의 원리를 외면하고 조잡한 정계 개편 따위로 권력 연장만 노리고 있구요….
리어 다른 쪽에서는?
현 잘록한 허리 치수를 자랑하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운하 파는 것 따위로 대통령 자격을 내세우고 있지요.
리어 한국 정당 중에 막내딸 코딜리아에 비교될 만한 게 있는가?
현 이건 딴 얘긴 데요, 일설에 의하면, 코딜리아(Cordelia)의 어원은 ‘사자의 심장’ 혹은 ‘사자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아마 매우 용기 있다는 뜻이겠지요.
리어 확실한 설은 아니지만, 웨일즈 말로 ‘바다의 보석’ 혹은 ‘바다의 숙녀’란 뜻을 갖고 있다고도 하던 걸. 또 보이저 2호가 1986년에 발견한 천왕성의 위성 이름이기도 해.
현 천왕성의 위성들은 세익스피어와 알렉산더 포프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지요? 오필리어, 데스데모나, 줄리엣, 미란다, 오베론 등은 세익스피어의 것이고, 엄브리엘, 에어리얼 등은 포프의 것이네요. 코딜리아가 천왕성에 가장 가까운 위성이라는 게 매우 함축적이지요. 지난번에 퇴출당한 명왕성에 비하면 코딜리아가 가장 가깝게 붙어서는 주위를 돌아주고 있는 천왕성이야말로 아주 행복한 행성이 아닐까요?
리어 자네 명왕성 얘기를 꺼낸 것은 천체들도 퇴출당하는 마당이니 정당이나 정치인들도 마땅히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게지?
현 …( _ /)
리어 그나저나, 작품 <리어왕> 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무엇이던가, 자네는? 광야에서 미친 내가 부르짖는 장면, 내가 코딜리아 시체를 안고 등장하는 장면 등 유명한 게 많은데. 리어왕>
현 글로스터의 눈을 둘째딸 리건과 그 남편 콘월이 파내는 장면에서 제 취향에 맞는 대사가 나오지요. “한쪽 눈만 빠지면 나머지 한쪽이 보고 놀릴 테니, 다른 쪽 눈마저 파내버리세요”라고 리건이 말하는 게 맘에 들어요. 악녀이기는 하지만 유머 감각이 돋보여요. ‘쌈마이 정당’들은 모두 현실 정치판에서 파내버리자는 얘깁니다, 제 말은.
리어 <리어왕> 의 마지막 대사에 ‘이 비통한 시대의 무게’(the weight of this sad time)라는 말이 나온다네. 리어왕>
현 예. 당당하게 ‘시대 정신’을 말하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시대의 무게’를 비통하게 여겨야 하는 게 아쉽지만요. 그럼,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요. 살펴 돌아가세요.
문화비평가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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