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와 고등과학원 등 연구 기관들이 잇따라 기관 평가에 나서고 있다. 언론사에 의한 대학 순위 매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석학들을 불러 세계 과학계에서 수준이 어느 정도이며 개선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등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국내에서의 지명도나 정부가 주는 지원금에 안주해서는 '세계 경쟁'에 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고등과학원 물리학부는 15~18일 4명의 저명 물리학자를 불러 물리학부 실사를 벌였다. 평가위원은 캐나다 토론토대의 J 리처드 본드 석좌교수, 일본 도쿄(東京)대 에구치 토루 교수, 프랑스 사클라이연구소 장 진-저스틴 교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물리천문학과장을 맡고 있는 톰 루빈스키 교수 등 해외 기관들도 즐겨 부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고등과학원이 10년밖에 안 된 기초연구기관으로서 놀랍게 발전했지만, 개선해야 할 점도 적지않다는 평가 결과를 내놓았다.
본드 교수는 "훌륭한 교수나 연구원을 끌어들이는 것이 고등과학원의 가장 큰 과제"라고 진단했다. "레너드 서스킨트 교수(미국 스탠포드대 교수ㆍ초끈이론 전공)와 같은 겸임교수가 1년에 한달간 머무르며 공동연구를 하지만 장기간 머무르는 정상급 물리학자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톱 과학자가 장기체류를 하기 위해선 가족을 위한 기반시설, 자녀의 교육문제 등 해결할 일이 만만치 않다.
고등과학원이 정부출연 연구소로서 전적으로 정부 예산지원에 의존하는 점도 재고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에쿠치 교수는 "연구기관이 고유의 연구기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부의 정책방향에 끌려갈 수밖에 없고, 좀더 자유롭게 장기 연구를 할 수 없다"며 "기업이나 후원자 등으로부터 기부금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 고등과학원 물리학부에서 응집물리와 천체입자 등의 분야가 별로 연구되지 않고 있어 연구 폭을 넓혀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고등과학원은 올 1월 같은 방식으로 수학부를 진단했을 때도 장기체류하는 방문교수가 없고, 모든 분야가 균형있게 연구되지 않고 있다는 충고를 들었다. 당시 평가위원들은 "수학부를 통해 고등과학원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연구원끼리, 다른 학부끼리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며 ▦대국민 활동을 전개하라는 조언을 남겼다.
서울대 역시 자연대와 공대에 대해 올초 진단을 받았다. 자연대의 경우 해외 석학들을 불러 연구역량을 진단하고 삼성경제연구소의 재정 진단을 받은 결과 공통적으로 ▦교수들이 100% 정년을 보장받는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학장과 학부장의 임기를 늘려 안정적인 책임 운영을 하도록 해야 한다
▦연구예산을 대폭 확충토록 기업이나 개인의 기부금 모금이 필요하다는 등의 제언이 나왔다. 서울대 자연대는 이를 토대로 학장 임기를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정년시스템을 개선하는 등 일부 제도를 개선했다.
특히 서울대, 고등과학원의 평가 결과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혁신방안 등을 살펴보면 연구비 재정 확충문제가 공통적으로 현안으로 꼽힌다.
서울대와 KAIST는 국내에서는 가장 연구비를 많이 지원받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상급 대학과 비교하면 10분의1 수준에 불과해 절대액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또 정부지원에 안주하지 말고 민간기부금 모집 등으로 자체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결국 지금까지는 정부 주도로 연구계를 키워왔지만 이에 대한 한계를 꼬집는 진단이어서 앞으로 변화가 예상된다.
고등과학원 금종해 연구부장은 "지난 10년간 학부를 설립하고 교수를 뽑는 데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 세계적 수준의 연구기관으로 도약해야 할 때"라며 "진단 결과를 발전계획을 수립하는데 적극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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