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일생에서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20일 경기 파주시 장단역 부근 비무장지대(DMZ). 문화재청이 이곳에 방치된 증기기관차(등록문화재 78호)를 보존처리하기 위해 인근 임진각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자 행사에 초청된 이 기관차의 마지막 기관사 한준기(79)씨는 가슴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기관차가 버려진 것은 한국전쟁 때였다. 1950년 12월 28일, 한씨는 연합군의 군수물자를 싣고 서울 수색역을 출발해 개성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는 연합군이 북한 인민군으로부터 빼앗은 화물열차가 서 있었는데 연합군이 그에게 노획 열차로 바꿔 타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했다.
명령에 따라 한씨가 몰고 내려오던 열차가 장단역에 도착하자 갑자기 연합군 통역이 나타나 "승무원들은 열차 안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그 순간,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한씨는 동료 승무원 2명과 함께 재빨리 역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나타난 연합군 병사 20여명이 기관차를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
총탄 세례에 증기통, 모래통 등이 깨지면서 기관차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됐다. 1950년 12월 31일 밤 10시10분께 발생한 사건이었다. 역 안으로 피신해 목숨을 건진 한씨는 그날 밤 다른 교통편으로 인근 문산으로 내려갔다.
한씨는 "50년 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도 연합군 병사가 내게 열차 안에 남아 있으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작전은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할 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하차 금지는 통역상 실수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증기기관차는 그때부터 무려 56년간이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증기기관차에 붙어있던 화물차 25량이 감쪽같이 사라진 점. 한씨는 이에 대해 "그 뒤 이곳을 다시 점령한 인민군이 기관차는 두고 화물차만 북쪽으로 가져간 것 같다"고 짐작했다.
어쨌든 자신이 몰고 온 기관차가 버려져 있던 것이 늘 아쉬웠던 그는, 2001년 군부대의 협조로 그곳에 간 적이 있다. 그때 군 관계자로부터 "녹이 많이 슬어 기관차를 버리려 했으나 안에 구렁이 두 마리가 살고 있어서 함부로 처분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증기기관차 위에는 현재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한씨는 이를 '생명의 상징'이라고 말했다. 보존처리 작업을 할 국립문화재연구소 등도 가급적 이 나무를 그대로 살려둘 계획이다.
보존처리 작업은 외부의 녹을 제거하고 추가 부식을 막기 위해 피막을 입히는 식으로 진행된다. 문화재청은 보존처리가 끝나는 2008년 3월께 원래 자리로 기관차를 옮길 예정이다.
한씨는 "내가 버린 기관차를 다시 고쳐 영구 보존한다니 너무 기쁘다"며 "이번 보존 작업이, 작지만 의미있는 통일의 밑거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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