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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길 위의 이야기] 패션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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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길 위의 이야기] 패션의 빈곤

입력
2006.11.1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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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옷들을 걸기 위해 옷걸이에서 여름옷들을 벗겨낸다. 앗, 이 옷! 결국 한 번도 입어보지 못했구나. 올 여름에 장만한 건데. 어깨 끈 검정 원피스와 레이스로 짠 하얀 볼레로. 근사하다! 평상복으로는 좀 튈까? 튀긴 뭘. 예쁘기만 하네. 나도 이렇게 좀 화사하게 갖춰 입고 다녀야지. 내년 여름엔 이 옷을 입고 제일 처음 이제하 선생님을 뵈어야겠다. 무어라 촌평하실지 궁금하다.

혜화역 플랫폼에서였다. 한 친구와 소설가 이제하 선생님과 열차를 기다리던 중 선생님이 우리를 훑어보며 핀잔하셨다. "너네는 옷차림이 그게 뭐냐? 왜 그렇게 양아치처럼 입고 다니느냐?" 여느 때와 별다른 차림도 아닌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실까? 같이 다니는 게 문득 창피하실 정도로 우리가 초라해 보이는 걸까?

당황해서 드린다는 말이 "선생님도 양아치 차림이면서요, 뭘" 하자 선생님은 펄쩍 뛰셨다. "얘들이! 나는 달라. 너희는 막 입은 거지만 난 색깔이나 패션이나 신경 써 맞춘 거야." 옳으신 말씀이었다.

마음은 히피이신 선생님조차 질색하실 정도면 내 옷차림에 문제가 있다. 실내복의 일상화라고나 할까, 멋하고는 담 쌓은 정도를 지나 척을 진 듯한 내 패션.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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