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모델로 선다니까 딸이 ‘엄마처럼 뚱뚱한 사람이?’ 라며 놀려. 그렇지만 상관 안하지, 평생을 옷만 박았는데 패션감각이 왜 없겠어!”
38년을 미싱일을 해온 천원순(57)씨는 요즘 신바람이 났다. 난생 처음 패션모델로 무대에 선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만든 옷을 입고서다. 브랜드나 디자이너 이름은 알아도 실제 옷을 만들어내는 미싱사는 투명인간 취급하는 사회, 19세 꽃다운 나이에 평화시장에 들어와 시다부터 출발해 평생 미싱을 타며 ‘머슴처럼 살았던’ 지난 세월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육순을 바라보는 중년의 가슴이 지금 철부지 소녀마냥 설레고 있다.
동대문 의류상가에 밥줄을 대는 하청공장 밀집지역 창신동이 소리없이 술렁이고 있다. 참여성노동복지터(대표 전순옥)가 운영하는 수다공방이 첫 패션쇼를 알리는 현수막을 내걸면서부터다. 수다공방은 갈수록 사양화하는 의류봉제업 종사자들을 재교육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자는 취지로 지난 6월 문을 연 기술교육센터다.
처음엔 ‘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재교육이냐’고 비아냥 댔던 주민들은 패션쇼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도 뭔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패션쇼는 ‘시다’ ‘공순이’ ‘제품쟁이’로 불리며 한국 의류산업의 근간이 됐으되 패션의 화려한 조명에서는 늘 외면 받았던 그들이 옷 생산의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선언하는 자리다
천씨는 “처음 수다공방에서 교육받는다니까 다들 우습게 생각했다”고 말한다. “30년 넘게 재봉틀 잡은 사람이 무슨 재교육이냐는 거지. 그런데 틀려. 시장 옷은 장수떼기(옷 한 장당 공임을 받는 것)라 막 밟는데 여기선 꼼꼼하게 몇 년 입어도 좋은 옷을 만드는 법을 배우니까. 기술을 업그레이드시켜서 정말 명품 한번 만들어보자, 장인정신으로 일하자 이거거든.”
12월 1일 서울패션아트홀에서 열릴 패션쇼에는 수다공방에서 재교육프로그램을 마친 1~3기 수강생중 40명이 무대에 선다. 처음엔 하루 16시간을 꼬박 재봉틀을 잡아야 생계가 유지되는 고단한 일상을 쪼개가며 재교육을 받은 수강생들이 기량을 뽐내는 소박한 무대로 꾸밀 계획이었다. 그런데 서울패션아트홀에 가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무슨 모델이냐며 뒤로 빼던 사람들도 내친김에 자신이 만든 옷 직접 입고 모델로 서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곽미순(47)씨는 “모델들이 어떻게 걷나 보려고 얼마 전 열린 디자이너 설윤형씨 패션쇼도 가봤다”면서 쇼 끝나고 무대 위에 올라가 나도 한번 걸어봤는데 할만하겠더라고. 말이 걷듯이 무릎을 탁탁 차듯이 걸으니까 되던데?” 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아까운 청춘, 지하에서만 썩었다”는 박만숙(53)씨는 “처음엔 좀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좋아. 말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해야지” 했다.
패션쇼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명인사들의 찬조출연도 속속 결정됐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여사를 비롯해 이상수 노동부장관, 장하진 여성가족부장관, 강금실 여성인권대사, 강지원 변호사, 심상정 국회의원,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등이 기꺼이 모델을 자청했다. 이은미 신해철 전인권 정태춘 박은옥 등의 축하공연도 펼쳐진다. 부대행사로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 달다’라는 주제의 전시회도 꾸민다. 10대 소녀시절부터 옷먼지 매캐한 작업실에서 미싱을 타며 1960~70년대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견인차역할을 했던 봉제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기위한 것이다.
패션쇼의 총감독인 (사)여성문화예술기획 박진창아 사무처장은 “하나의 패션이 완성되려면 디자인과 소재만이 아니라 단추 하나도 정성껏 박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데 그 섬세한 손길은 그동안 무시돼왔다”면서 “이번 패션쇼는 숨겨졌던 봉제사들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직업적 자긍심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될 것”이라고 밝혔다.
천원순씨는 “다른 직업에서 이만한 세월을 보냈으면 최고 대우 받았을 것”이라며 “(패션쇼를 통해) 이젠 정말 인정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 '창신동 봉제사 브랜드' 수다공방
패션쇼 한번 했다고 인생이 달라지냐고? 달라질 수 있다. 수다공방 패션쇼가 주목받는 것은 봉제사들이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나서기 때문이다. 그 옷들은 수다공방이 단지 기술재교육센터에 자족하지 않고, 브랜드 인큐베이터 역할을 자임하는 증표. 패션쇼에 나서는 창신동 제품쟁이들은 ‘수다공방’이라는 브랜드로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꿈을 꾸고있다.
(사)참여성노동복지터 전순옥 대표는 “자신의 이름과 기술력을 걸고 정성스럽게 만든 옷들을 생산부터 판매까지 우리 힘으로 해보자는 취지”라며 “내년 2월 작업장이 마련되면 곧 수다공방 옷 전문 매장도 갖출 계획”이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번 패션쇼는 수다공방 브랜드의 런칭기념 무대가 되는 셈이다. 패션쇼 당일에는 행사장 한쪽에 옷들을 전시하고, 소비자들이 직접 만져보고 입어보며 구매할 수 있게 할 예정.
의류브랜드 ‘수다공방’은 40~50대 여성들을 겨냥한 보기에 좋고 입어서 아름다운 옷을 추구한다. 면과 마, 실크 등 천연소재에 천연염색을 해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옷, 단순하지만 참신한 매력이 넘치는 옷이 컨셉이다. 아이템은 정장부터 이브닝드레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일반 의류브랜드 처럼 매장을 여럿 두는 대량생산 체제를 지양하고, 소량에 고품질로 ‘오랫동안 소중히 아껴가며 입는 옷’을 만든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LG패션 디자인실장을 지냈던 박혜정씨가 디자이너로 합류했다.
옷은 철저히 ‘원가공개, 생산지실명제’를 추구한다. 상주서 짠 명주 원단을 괴산서 천연염색하고 수다공방서 제조했다는 식의 설명서가 붙을 것이고, 원단값, 디자인 값, 봉제공정 값 등도 공개한다. 판매가격의 20%가 봉제공임이다. 보통 100만원짜리 디자이너 브랜드 원피스 한벌 봉제공임이 1만5,000원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호조건. 소비자 판매가는 정장 한벌이 35만~40만원 정도로 잡고있다.
“우리에게는 따로 홍보나 광고, 유통마진을 뗄 이유가 없습니다. 이 브랜드의 목표는 단 하나, 소비자도 좋고 생산자도 행복한 옷 만들기를 하자는 거죠.”
수강생들의 반응과 기대도 뜨겁다. 박만숙씨는 “시장 옷이 브랜드가 어디 있나. 시키면 시키는 대로 (미싱을) 드륵드륵 박기만 하며 그만이지만 이제는 정말 내 브랜드로 공들여 만들어 사람들에게 입힐 기회를 갖는다는 게 너무 좋다”며 “제발 계획대로만 잘 진행됐으면 하는 게 소망”이라고 말했다. 우귀자씨는 “옷이 잘 팔려서 남 놀 때 나도 놀면서 일할 수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곽미순씨는 “수다공방이 버버리 처럼 알아주는 명품이 됐으면 좋겠다, 꼭 그렇게 돼야한다”고 다짐했다.
창신동 지역 3,000여 하청봉제공장에서 일하는 1만3,000여 봉제사들의 시선이 지금 수다공방에 쏠려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 수다공방 패션쇼 여는 전순옥 대표
“패션쇼의 역할은 봉제 기능공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내놓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알려지지않으니까 값싼 노동력으로 치부되는 현실을 바꿔보자는 거죠.”
수다공방을 운영하는 (사)참여성노동복지터 전순옥 대표의 요즘 화두는 ‘봉제업의 맥 살리기’다. 패션산업이 성장하려면 디자인이나 소재개발 뿐 아니라 고도의 제조기술이 밑받침되어서 삼박자가 척척 맞아 들어가야한다. 그러나 현실은 동대문 의류상가에 값싼 중국이나 동남아 제품이 쏟아져들어오고, 대기업은 좀 더 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면서 그 직격탄을 봉제기술자들이 맞고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 15시간을 꼬박 일해야 겨우 150만 원의 월급을 받는 현실. 그나마 일감이 없는 비수기에는 객공(정식 직원을 줄이기위해 봉제공장에서 다시 하청을 주는 형태)의 경우 수입이 전무하다.
전 대표는 “봉제사들은 1960,70년대 한국 경공업시대 의류산업의 주역이었고 이들의 노동력은 오늘날 한국이 세계 12위 경제대국에 오른 밑거름이었다”며 “그러나 최근엔 워낙 근무환경이 나쁘고 임금도 낮다 보니 새로 들어오는 인력이 없다. 봉제기술자의 태반이 40, 50대다. 이러다가는 국내 봉제기술자의 맥이 끊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수다공방은 값싼 해외 봉제력에 맞대응하기 위한 시도다. 봉제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부가가치를 더하자는 전략. 30, 40년간 미싱을 돌렸지만 값싼 장수떼기가 몸에 밴 사람들에게 재교육을 통해 기술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를 제공, 제 값 받고 일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무조건 빨리빨리 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천천히 꼼꼼하게’를 주문하는 이유다.
“산업전반에 걸쳐 아웃소싱이 활발한 미국에서도 부시대통령이 전체 봉제물량의 최소한 25%는 자국내에서 하도록 산업계에 요구, 제조기술의 공동화를 막기위해 노력합니다. 수다공방의 개소가 서울지방노동청의 지원(2억5,000만원)을 통해 이루어졌듯이 정책적인 차원에서 제조기술 살리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죠.”
전 대표는 청계피복노조운동을 한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다. “봉제기술의 고급화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주 5일 하루 8시간씩 일하면서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전태일 열사가 생전에 구상했던 ‘모범공장’을 연상시킨다. 다소 이상적인 목표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성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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