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던 만큼 결과가 더욱 초라하다. 출자총액제한제 대안으로 재벌 계열사 간 순환출자 금지를 추진했던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의 현재 모습이 그렇다. 순환출자는 금지하지 않고 출총제 대상을 대폭 축소하는 수준에서 정부 최종안이 확정됨에 따라 권 위원장과 공정위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권 위원장은 최근까지 환상(고리)형 순환출자 금지 방안을 출총제의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왔다. 내부적으로 그룹별 순환출자 해소 시나리오까지 검토했다.
재계의 반발이 거셌지만,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장기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사업 지주회사 등의 유인책을 마련하겠다는 그의 발언에 대해 ‘문제의 핵심을 찌른 정공법’이라고 지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권 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출총제 폐지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출총제가 왜 있는지 그 이유부터 따져봐야 한다. 바로 순환출자의 폐해가 있기 때문 아니냐”며 “출총제 폐지에 앞서 순환출자의 폐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순환출제 금지안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타 부처 등이 재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상황이어서 공정위로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권 위원장은 지난 3월 취임한 이후 공정위의 업무영역을 넓혀왔다. 금융 통신 방송 등 전통적으로 정부부처의 규제를 받아온 규제산업 분야에 대해서도 경쟁원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금융감독위원회 정보통신부 방송위원회 등과 날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 위원장이 결과적으로 소신을 관철시키지 못함에 따라 향후 공정위의 권한이나 업무 추진력에 상당한 타격이 예상된다.
출총제 대안 마련작업은 공정위의 ‘무능’을 드러내기도 했다. 권 위원장은 “출총제는 순환출자는 제대로 막지도 못하면서 기업 투자는 제한하는 무식한 제도”라고 혹평한 바 있다. 그런데도 공정위는 ‘도로 출총제’ 외에는 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일본만 하더라도 출총제의 모델이 됐던 제도를 2002년 폐지하고 그 대안으로 대기업 업종제한을 주축으로 한 독창적인 제도를 마련해 현재 적용하고 있다.
더구나 현행 출총제는 1987년 국내 도입된 이후 잦은 제도 변화와 지나치게 많은 예외규정으로 인해 실효성까지 의심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공정위는 누더기가 된 출총제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재계와 타 부처의 압력에 밀려 그 제도를 축소ㆍ유지하는 방안을 택했다. 출자제한을 40%로 완화한 것도 출총제 도입초기의 수준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래저래 공정위는 이번 출총제 대안 마련 과정에서 추진력 부재와 무능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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