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blind)라는 영어 단어의 제1어의는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유치원생 수준의 어휘 인식일 뿐이어서 모든 ‘블라인드’에 ‘눈 먼’을 갖다 붙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뜻이 되어버리고 만다. ‘블라인드 데이트’((blind date)란 ‘눈 먼 데이트’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이 현장에서 만나 곧바로 시작하는 데이트를 뜻한다. 와인 시음의 최고 경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이다. 라벨을 가리고 오직 그 와인의 풍미(flavor)만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인데, 제 아무리 내로라 하는 와인 전문가라 하더라도 이 냉정한 시음 방법 앞에서는 속수무책의 실수를 연발하기 마련이다.
등산 전문용어들 중에서도 블라인드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이 있다. 내가 가장 멋진 등산 용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블라인드 코너’((blind corner)다. 직역하면 ‘눈 먼 모퉁이’가 되어버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자, 여기 암벽등반의 한 순간이 있다. 더 이상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여 이제 후퇴를 해야만 하는데 단 하나의 희미한 가능성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현재의 암벽을 버리고 허공을 훌쩍 건너뛰어 맞은 편의 바위에 붙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 맞은 편 바위의 너머가 정상으로 이어질지 빼도 박도 못할 막다른 골목이 되어버릴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블라인드 코너다.
자, 여기 히말라야 등반의 한 고비가 있다. 오른쪽의 능선은 접근이 불가능해 보인다. 왼쪽 능선에 올라서면 정상으로 다가가는 길이 나타나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일단 왼쪽 능선으로 올라선 다음에는 후퇴가 불가능하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게 바로 블라인드 코너다. 굳이 우리 말로 옮겨보자면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를 알 수 없는 갈림길’ 정도가 된다. 당신의 등반 경력 중에서 이런 모퉁이에 서 본 경험이 있는가. 그러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등반의 진정한 묘미이며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를 훤히 꿰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모험이 아니며 단지 고단한 노동 혹은 빤한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내 일천한 등반 경력 중에서도 몇 차례 그런 짜릿한 순간을 맛본 적이 있다. 이름 없는 지방의 암장이었다. 그곳에 사는 후배 산악인은 굳이 날더러 선등을 해보라고 했다. 이를테면 일종의 ‘바위 접대’인 셈인데 나처럼 등반 솜씨가 ‘메주’인 친구는 남 몰래 식은 땀을 흘리게 되는 순간이다. 왼 손을 쭉 뻗어 홀드에 매달리면 몇 초 동안은 허공에 떠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다음에 몸을 끌어올리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그 다음’이다.
몸을 끌어올린 다음에는 곧바로 새로운 홀드나 스탠스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바로 블라인드 코너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일 이 분 후면 추락할 것이 확실했으므로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왼 손을 쭉 뻗어 홀드에 매달린 다음 지체 없이 몸을 끌어올리고서는 급하게 다음 홀드를 찾았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확실한 홀드가 바로 그 위에 숨어 있었다. 아아 허겁지겁 그 홀드를 움켜 쥐었을 때의 그 뿌듯한 성취감과 가슴이 터질듯한 기쁨이란!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등반이란 블라인드 코너를 통과하는 일이다.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현재의 지위를 버리고 그곳에 달라붙을 때의 그 과감한 결단. 그리고 그 너머에서 숨겨져 있던 새로운 길을 찾아냈을 때의 그 자랑스러운 성취감. 블라인드 코너에 도전할 때 성공의 가능성을 점쳐 보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다. 성공이 아니면 실패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선조들은 진인사대천명이라 말했다. 유대인들의 속담은 보다 문학적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지면의 끝이 보이니 난감한 노릇이다. 오늘 내가 산과 사람에 대하여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블라인드 코너다. 그것은 등반 전문용어들 중의 하나이며, 등반의 본질 그 자체를 꿰뚫고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동시대의 산악인 제프 태빈이 남긴 7대륙 최고봉 등정기의 제목이기도 하다. 흔히 ‘세븐 서미트’라고 표현되는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한 산악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들이 남긴 등반기들 역시 서가의 한쪽 면을 빼곡이 채우고도 남는다. 하지만 내가 가장 즐겁게 읽었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던 책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당연히 제프 태빈의 ‘블라인드 코너’다.
제프 태빈을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등반가라고 말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그의 등반 능력은 전문가 그룹의 중하위권에 속한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유쾌한 모험가이자 탁월한 글 솜씨를 지닌 작가이고, 양 어깨와 목에서 힘을 완전히 뺀 겸손한 산악인이며, 자신의 전공인 의술로 히말라야의 원주민들을 성심성의껏 치료해주고 있는 박애주의 의사다. 무엇보다도 그는 블라인드 코너의 참 맛을 아는 사람이다. 그가 남긴 책의 모든 페이지들은 그 자체로 블라인드 코너다. 그 다음 페이지에 무엇이 쓰여져 있을지 너무도 궁금하여 읽는 속도를 멈출 수 없다. 제프 태빈은 빙긋 웃으며 말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지루한 노역일 뿐이다. 나에겐 아직도 실패할 수 있는 꿈이 많이 남아있다.” 산악문학작가
유대계 미국인인 제프 태빈은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의대에 재학하던 중 마셜장학금을 수상하여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암벽등반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만 찾아 다니는 모험광이 된다. ‘블라인드 코너’에는 그가 헤집고 다닌 지구의 오지들이 유쾌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독자들로 하여금 배를 잡고 구르게 하는 것은 인도네시아의 칼스텐츠 등반기이다.
칼스텐츠의 산 아래 부락에서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이리안 자야의 데니족이 산다. 이 산의 초등자인 하인리히 하러 역시 이들과 수 개월 동안 함께 생활한 다음 ‘나는 석기시대에서 돌아왔다’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유쾌한 청년 의사 제프 태빈은 이들 원주민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의 솔직한 고백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우리는 고어텍스 의류와 냉동 건조식품 그리고 최신의 등반장비로 중무장을 하고 비장한 자세로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 원주민은 맨발에 벌거숭이 차림으로 설렁설렁 우리와 함께 정상에 올랐다. 누가 더 위대한 등반가들이란 말인가?”
제프는 뛰어난 언변으로 ‘펜트하우스’에 고정 여행칼럼을 쓰고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레터맨이 이제 세븐 서미트를 다 정복했으니 다음에는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자 제프 태빈은 황급히 질문 자체를 부정했다. “산을 정복하다니요?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단지 잠시 동안 그 산의 일부가 되었던 것 뿐이고, 무엇보다도 운이 좋았지요. 세븐 서미트 이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에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가 무궁무진 남아 있답니다. 이 지구와 우주 자체가 블라인드 코너랍니다.”
산학전문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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