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녘까지 머물러 있던 늦더위 때문인지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느닷없다고 느껴지던 토요일 오후. 홍익대 앞 카페에서 만난 가수 양희은(54)은 약속보다 30분 정도 늦게 나타났다. “제가 약속에 늦는 법이 없는데요. 강남에서 선약이 있어 들르다 보니 길이 너무 막히더라고요.” 주말 서울의 교통 상황에 대해 손사래를 치며 한숨 돌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대한민국 아줌마다.
“흔히 아줌마에 대해 극성맞다고 힐난 하기도 하죠. 하지만 아줌마들은 결코 사람 사이의 기본을 잊지 않아요.” 또렷한 목소리로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는 그 역시 기본을 잊지 않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는 해도 태산에 걸려 넘어지진 않죠. 정치도 거창한 말을 앞세우기 보다 기본을 중시한다면 지금보다 살 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가 똑 소리 나게 정치와 사회에 대해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건 8년간 MBC 표준FM <여성시대> 를 진행하면서 ‘인생수업’을 한 덕분이란다. 여성시대>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할 줄 아는 그에게는 아직도 ‘<아침이슬> 의 가수’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 1971년 이 노래로 데뷔한 이후 그는 암울한 시대 상황에 억눌린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가수로 일반에 각인돼 왔다.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아직도 정치권에서 정당 홍보 노래를 불러 달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그 분들이 제 노래를 좋게 들어주시는 것은 감사하죠. 그러나 제가 정치 행사에 나서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침이슬>
의도와 상관 없이 저항문화의 선봉에 서기도 했고, 그로 인해 금지곡도 많아 노래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는 양희은. 하지만 그 세월을 지탱해 온 힘은 <상록수> 같은 포크 음악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데뷔 35주년을 기념해 12곡의 신곡으로 정성스레 채운 <양희은 35> 음반을 발표하고, 다음 달 14,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연다. 양희은> 상록수>
이번 음반은 더욱 편안해진 통기타 연주에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들로 구성됐다. 타이틀 곡 <당신만 있어준다면> 은 “우리 아프지 말아요/ 먼저 가지 말아요/ 이대로도 좋아요/ 아무 바람 없어요/ 당신만 있어준다면”이란 가사처럼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거동조차 힘들었던 남편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 “만약에 누군가가 내게/ 다시 세월을 돌려준다 하더라도/ 웃으면서 조용하게/ 싫다고 말을 할 테야”라는 <인생의 선물> 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애착이 지난 세월의 선물이라고 조근조근 말한다. 인생의> 당신만>
그의 노래가 편해진 이유는 삶의 여유를 찾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관객들과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편안한 노래들로 공연을 꾸미고 싶다는 그는 무대에 서는 것이 매번 떨리고 무섭다고 한다.
“한번은 공연에서 <내 어릴 적 학교> 를 부르는데 통곡하는 관객이 있었어요. 사연을 들어 보니 그 분 아들이 ‘왕따’를 당해 대안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내 어릴 적 학교> 가 대안학교의 교가라서 아들 생각이 나셨다고 하더군요.” 학교 가는 풍경을 그린 이 노래가 청중에 따라 위로가 될 수 있고 아픔도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노래는 결코 한 번 부르고 마는 가벼운 대상이 아니다. “나이 들어 무언가를 알아 가면서 생기는 두려움이죠. 그로 인해 관객 앞에서 겸손해지고, 또 그것이 가수로서의 기본 자세가 돼 주는 셈이죠.” 내> 내>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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