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출자총액제한제도에 대한 정부의 대안 마련이 결국 몇 달간 소리만 요란하다 현행 제도를 축소ㆍ유지하는 선에서 타협됐다. 적용대상이 대폭축소 되고 대상기업의 출자한도가 2배 이상 늘었지만,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방지할 대책은 마련되지 못해 재벌 지배구조가 더욱 악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5일 확정된 정부안은 공정거래위원회와 재계의 대립구도에서 재계가 승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재계가 주장대로 출총제가 완전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공정위가 재벌 계열사 간 순환출자 금지를 대안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것을 감안하면 정치권과 재경부 산자부를 등에 업은 재계가 결과적으로 그 뜻을 상당부분 관철한 셈이다.
출총제 적용 대상 기업이 343개에서 24개로 대폭 축소된 데 이어 출자 한도도 개별기업 자산 총액의 25%에서 40%로 늘어남에 따라 출총제가 유지되는 24개 기업이 타 기업에 출자할 수 있는 자본총액은 현재 16조원에서 32조9,000억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나게 된다. 24개 기업은 현행 출총제 하에서 평균 6,680억원의 출자여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번 방안이 확정되면 1조4,000억원으로 출자여력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재벌들은 기존보다 훨씬 운신의 폭이 넓게 다른 기업을 인수하거나 계열사간 출자를 늘릴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재벌 총수들이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통해 편법으로 지배권을 강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국내 재벌 상당수는 A사→B사→C사→A사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로 가공의 자본을 만들어 적은 지분으로 전체 그룹을 지배하는 폐단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 출총제 축소로 더욱 자유롭게 순환출자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실제 출총제가 일시 폐지됐던 1998년 2월~2001년 3월 동안 재벌들은 투자보다는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늘려 총수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적도 있다.
공정위가 강력히 추진했던 순환출자 금지방안은 정부 최종안에 ‘권고’ 수준의 초라한 모습으로 겨우 흔적을 남겼다. 순환출자 해소 시에 세금부과 연기 등 유인장치를 둬 자발적 해소하도록 유도한다는 정도다. 재벌들의 선택에 맡겨 둔 것이다. 더구나 유도장치라고 하는 세제혜택도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지분매각 시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세금부과를 일시 연기해 주겠다는 수준이기 때문에 자발적 순환출자 해소의‘미끼’가 되기에는 턱없이 미흡하다. “조세 형평상 세제 혜택은 절대 줄 수 없다”는 재경부의 입장이 거의 그대로 관철된 것이다.
인하대 김진방 교수 “이번 정부안으로 인해 재벌들이 자회사의 출자금을 모회사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쓰는 행태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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