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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우정편지] 소설가 마광수가 독자 보라 씨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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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우정편지] 소설가 마광수가 독자 보라 씨에게 보낸 편지

입력
2006.11.15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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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격려편지, 창작에 새 힘으로…

독자 보라씨에게

아파트 수위실에 맡기고 가신 케이크와 편지, 잘 받았습니다. 직접 제 집까지 찾아와 선물과 함께 놓고 간 독자의 편지를 받아보긴 처음입니다. 얼굴을 직접 뵙지 못하고 이름만 알기에, 더욱 아련한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지요.

당신은 분명 상상력과 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여성인 것 같습니다. 제가 최근(1996년10월)에 낸 장편소설 <불안> 을 잘 소화해서 읽어주셨으니까요. 한국에는 이상하게도 유미주의의 전통이 없습니다. <불안> 은 탐미주의의 입장에서 묘사적 리얼리즘의 회복을 목표로 시도해본 일종의 ‘실험소설’인데, 페티시즘(Fetishism)의 미학을 좀더 집요하게 천착해본 작품이지요.

영상적 판타지를 겨냥하기 위해 뚜렷한 스토리나 대사 없이 여성의 외양과 복장, 그리고 성희 행위만을 사진 찍듯 묘사해간 소설이라서, 대다수의 독자들 반응은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당신께서는 <불안> 에 나오는 몽환적이고 신비한 사랑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작가로서는 자기의 문학세계를 알아주는 독자가 단 한명이라도 있을 때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나 저처럼 끊임없는 구설과 매도, 그리고 필화(筆禍)에 시달려온 작가라면 더욱 그렇지요.

당신께서는 또 제 얼굴이 늘 착하고 천진스런 소년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벌써 늙어버린 제 나이에 비해볼 때 너무나 과분한 칭찬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당신의 격려로 크게 용기를 얻게 된 게 사실입니다. 저도 이젠 정말 연애다운 연애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찬 예감을 느끼기까지 했으니까요.

당신은 우리 사회가 몰개성(沒個性)이 정상으로 취급받는 사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개성이 ‘모난 돌’로 치부되어 ‘정’을 맞을 수밖에 없는 사회, 그런 획일주의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입니다.

1997년 새해를 맞이하고 나서 저는 한동안 우울했습니다. 교육계에서나 문학계에서나 외롭게 소외돼 있는 저의 처지가 안쓰럽게 느껴져서입니다. 주변의 외압(外壓)때문에 자꾸만 제한돼가는 저의 관능적 상상력과, 그 결과 상상을 실제적 사랑으로 실천하는 면에 있어 전혀 능동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저의 현재 상태가 짜증났기 때문입니다. 영영 아웃사이더나 소외자로 머물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촌스럽게도 제 노후(老後)까지 걱정하게 만들었지요.

당신의 편지를 읽고 나서 저는 다시금 제 아이덴티티(Identity)를 재확인한 동시에, 사랑과 창작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해 부디 복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1997년 1월 8일 마광수 드림

■ 김다은의 우체통

독자와 우정으로 어려움 견뎌내

마광수씨는 처음에 알 수 없는 말을 되뇌었다. 아깝다, 아까워! 포대가 없어졌어! 예전에 마씨는 독자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눈사태가 날 정도였다. 아예 커다란 포대에 편지들을 보관해 왔는데, 그 포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골골샅샅이 뒤지다가 간신히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그는 “너무 소중해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기로 했다”한다.

마씨는 1995년 <즐거운 사라> 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는다. 죄목은 ‘음란물 제조죄’. 몸담고 있던 학교에서도 해직된다. 그 고통스런 상황에서 나온 소설이 <불안> 이다. 당시 2만권이 팔리면서 독자들의 위로와 격려가 줄을 이었다. 학계와 문학계가 ‘즐겁지 못한 사라’ 사건으로 그를 외면할 때, 마씨의 시마(詩魔)를 불러일으킨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우정이었다.

소설가ㆍ추계예대 교수 김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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