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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7> 모호한, 그리고 물렁물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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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7> 모호한, 그리고 물렁물렁한

입력
2006.11.1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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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행성에는 얼마나 많은 자연언어가 있을까? 정확한 수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대강의 수도 모른다. 언어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도 자신들의 ‘전문성’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수천에서 1만 여라고 두루뭉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연언어의 수를 얼추라도 헤아리기 어려운 이유는 크게 셋이다. 첫째, 아직 찾아내지 못한 언어가 많으리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기록되는 언어의 수야 쉽사리 셀 수 있지만, 이 행성에는 오직 입말로만 전해 내려오는 언어가 더 많다. 그리고 그런 작은 언어들은 언어학자나 인류학자의 그물에 남김없이 걸려들 수가 없다. 둘째, 언어가 (기존 언어의 분화를 통해) 끊임없이 생겨나고 (기존 언어의 힘에 밀려) 사라지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망이 촘촘히 퍼진 요즘엔 새로 생겨나는 언어보다 없어지는 언어가 훨씬 많다. 이 행성에서 가장 힘센 종인 인류의 횡포로 다른 생물들이 가뭇없이 멸종해가듯, 힘센 언어의 자기 확장 욕망에 휩쓸려 많은 언어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자연언어의 수를 확정할 수 없는 마지막 이유는, 이론적으론 가장 골치 아픈 이유이기도 한데, 개별언어와 방언의 경계를 긋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별언어와 방언을 구분하는 데 가장 널리 쓰는 기준은 소통 가능성이다. 어떤 사람이 제 언어로 타인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을 때, 이들은 한 언어를 쓰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이들의 말씨가 꽤 다르더라도 그들은 한 언어의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난점이 있다. ‘소통의 정도’ 문제다. 말하자면 얼마만큼 소통이 돼야 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여길 수 있는가의 문제다. 서울말 화자는 (경북) 봉화말 화자와 얘기할 때보다 (강원도) 홍천말 화자와 얘기할 때 소통이 더 매끄러울 것이다. 또 그는 (제주도) 서귀포말 화자와 얘기할 때보다는 봉화말 화자와 얘기할 때 소통이 더 매끄러울 것이다.

장면에 따라서, 서울말 화자와 봉화말 화자의 대화나 서울말 화자와 서귀포말 화자의 대화는 많은 오해로 얼룩질 수 있다. 그러니까 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 소통의 어려움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렀을 때 이를 소통 불능으로 판단할 것인지는 일차적으로 화자들의 언어 직관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 직관에 따라 서울말과 봉화말은 한국어라는 한 언어의 방언들로 간주된다.

그러나 언어와 방언을 가르는 기준이 이렇듯 순수하게 언어학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서귀포 출신 화자가 어려서 가족에게서 배운 말로 서울 출신 화자와 의사를 소통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소통의 어려움은 덴마크어 화자와 스웨덴어 화자가 서로 말을 나누며 겪는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크다. 그러니 언어학적 기준만으로는, 서귀포말을 포함한 제주도말을 한국어와는 다른 언어로 분류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언어는 한국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가 될 테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는 제 영토 안에서 사용되는, 사뭇 닮은 여러 형태의 말들을 서로 다른 개별 언어들로 여기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학문적으로 엄격한’ 분류가 정치공동체의 분열을 다그칠 수도 있으리라는 염려 때문이다. 만약에 제주섬에 독립 국가가 들어서 있다면, 그 나라 언어학자들만이 아니라 뭍의 언어학자들도 제주도 토박이들의 말을 한국어와는 다른 언어로 분류할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는 한 언어의 방언에 지나지 않는 이윌란반도(유틀란트반도)의 말과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말이 정치공동체의 구획에 따라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따위로 개별언어의 지위를 얻었듯 말이다. 이렇게 정치는 언어와 방언의 공간을 휘어놓는다.

언어 경계에 대한 정치의 개입은, 이보다 눈에 덜 띄지만 훨씬 더 중요하게, 시간 축에서도 이뤄진다. 서울 출신의 한 신문기자가 한글날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한성으로 날아가 세종대왕과 인터뷰를 했다 치자. 그는, 필담에 의지하지 않는 한, 세종과 거의 말을 나눌 수 없을 게다. 설령 그가 고등학교 시절 고문(古文) 공부를 열심히 해 15세기 한국어를 제법 익혔다 해도 마찬가지다.

현대한국어에선 사라진 성조에 실려 나오는 세종의 말은 그 신문기자에게 외국어처럼 들릴 게 분명하다. 현대한국어 화자는, 그가 중세한국어 전공자가 아닌 한, 15세기 한국어화자와 의사를 소통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언어 경계를 의사 소통 가능성에 두는 언어학적 기준에 따르면 15세기 한국어와 현대한국어는 서로 다른 언어다. 그러나 일상적 용법으로는, 지금의 서울말도 15세기 서울말도 둘 다 ‘한국어’라 부른다. 단지 지금의 서울말은 현대한국어라 부르고, 15세기 한국어는 중세한국어라 부를 뿐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언어를 ‘한국어’라는 한 이름으로 묶는 것은 15세기 조선조와 21세기 대한민국의 공동체적 연憺봉?고려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편의적 용법이 중세한국어와 현대한국어가 엄연히 ‘다른’ 언어라는 사실을 가리지는 못한다. 현대한국어는 중세한국어가 진화한 것이지만, 그 둘은 서로 다른 언어다. 두 언어의 화자들이 의사를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5세기 한국어도 이럴진대, 그보다 훨씬 이전의 고대한국어가 현대한국어와 다른 언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현대 한국인들이 고대한국어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이 현대일본어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말하자면 고대한국어는 현대일본어보다도 현대한국어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언어다. 10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주민집단이 한 정치공동체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에 눈길을 주느라, 우리는 고대 중세 한국어와 현대한국어가 서로 다른 언어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따로 배우지 않고서는 고대 중세한국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고대 중세한국어가 현대한국어와 ‘다른’ 언어라는 사실의 가장 확실한 예증이다.

시간대를 더 좁혀 잡아도 마찬가지다. 18세기 서울 사람과 지금의 서울 사람도 의사 소통하기가 쉽지 않을 게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가상의 신문기자가 연암 박지원을 인터뷰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게다. 이들은 서로 (거의) 다른 자연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여행자들은 미리 해당 시공간의 언어를 익히는 수고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동통역기를 반드시 갖추어야 하리라.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대상은 여러 차원에서 중층적인 구성물이다. 우선 한국어는 많은 지리적 방언들(중부방언, 서북방언, 동남 방언 등)과 사회 방언들(민중의 속어나 은어, 특정 지식집단의 전문어 따위)의 중층적 구성물이다. 더 나아가 한국어는 시간 축을 타고 나타났다가 사라진 수많은 언어들의 중층적 구성물이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들이라 할 수 있다. 그 한국어가 정확히 몇 개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한 시점의(이를테면 1700년의) 한국어가 정확히 그 전 어느 시점부터 이 언어로 변했고(즉 그 이전의 한국어와 의사소통 가능성이 사라졌고) 그 이후 어느 시점부터 다른 언어로 변했는지 확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은 어렵다기보다 불가능하다. 당대의 언어 변화는 의사소통 가능성 안쪽에서 이뤄지기 마련이지만, 그 자잘한 변화들이 쌓이면서 한 언어는 아무도 모르게 기준시점 언어와의 소통불능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600년대의 한국어와 1700년대의 한국어는 소통이 가능했고(다시 말해 한 언어였고), 1700년대의 한국어와 1800년대의 한국어, 1800년대의 한국어와 1900년대의 한국어, 1900년대의 한국어와 2000년대의 한국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더라도, 최초의 기준시점인 1600년대 한국어와 2000년대 한국어는 소통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언어다.

이것은 다른 자연언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나 이탈리아어는 고대 로마인들이 쓰던 속(俗)라틴어가 진화한 것이다. 문자로 기록됐던 고전 라틴어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지식인들의 문자언어로 전수되며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저잣거리에서 쓰던 속라틴어는 각 지역 기층언어 위에 얹혀지며 진화의 방향을 조금씩 다르게 취했고, 정치공동체들의 성쇠에 따라 여러 언어로 분화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어디가 속라틴어의 끝머리고 어디가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의 시작인지를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또 속라틴어의 한 진화 형태가 프랑스어라는 이름을 얻은 뒤에도, 의사소통 가능성을 기준으로 몇 개의 프랑스어가 시간 축 위에 존재했는지 확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현대 한국인이 따로 공부하지 않고는 신라 향가를 읽을 수 없듯, 현대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도 따로 공부하지 않고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 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프랑스어나 현대이탈리아어가 라틴어와 ‘다른’ 언어이듯, 현대한국어도 고대한국어와 ‘다른’ 언어다.

위에서 거론한 중층성은 한국어라는 뭉치들이 여럿 있다는 의미의 중층성이었다. 그러나 한국어는 그 내부적 기원에서도 중층적이다. 이를테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흔히 고유어라고 부르는 어휘와 중국이나 일본에서 건너온 한자어들과 그 밖의 외래 어휘를 제 어휘장 안에 시간 축과 나란히 포개 왔다는 점에서 한국어는 중층적이다. 그러나 이런 외래어가 쏟아 들어오기 전의 한국어도 중층적이었을 수 있다.

언어학자 김방한은 <한국어의 계통> (1983)이라는 책에서 고대 한국어에 이미 두 개의 층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한국어는 알타이어계, 그 가운데서도 특히 퉁구스어계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언어이지만, 그 밑에는 그가 원시한반도어라고 부르는 정체불명의 기층 언어가 눌려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 김방한의 견해다. 다시 말해 비알타이어인 이 기층 언어에 알타이어계의 언어가 얹淺?한국어가 형성되었으리라고 김방한은 추정한다.

물론 누구도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 언어를 분석해보기 전에는. 확실한 것은 이런 중층성이 (지금까지 언어학자들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자연언어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한국어(나 일본어나 영어)의 내부적 중층성은 ‘순수한 한국어’(나 ‘순수한 일본어’나 ‘순수한 영어’)라는 것을 획정할 수 없게 하고, 그 외부적 중층성은 ‘한국어’(나 ‘일본어’나 ‘영어’)라는 것 자체의 경계를 획정하기 어렵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한국어라고 부르는 대상이 대단히 모호하고 물렁물렁하다는 뜻이다. 그런 모호함과 물렁물렁함을 곱씹어보고 나면, 언어를 둘러싼 갈등에 지불하는 정열을 꽤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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