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의 소신이 결국 꺾이는 것일까.
14일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된 출자총액제한제도 대안에 대한 정부의 단일안에 재벌 계열사간 환상(고리)형 순환출자 금지 도입이 명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권오승 위원장,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은 이날 관계장관 회의에서 출총제 대상을 20여 개 중핵기업에만 적용하는 ‘출총제 축소’ 방안을 중심으로 단일안 도출에 합의했다. 자산총액의 25%이상을 출자할 수 없도록 한 규제기준도 30~40%로 완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방안은 기존 공정위안에서 상당히 후퇴한 것이다. 권 위원장은 “A사→B사→C사→A사로 이어지는 계열사간 순환출자는 가공의 자산을 만들어 총수가 적은 지분으로도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편법”이라며 규제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7월 관계부처와 시민단체, 재계, 국책연구원 관계자 등 11명으로 구성된 민간합동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출총제 대안 마련에 들어간 뒤 지난 5개월 동안 공정위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특히 권오승 위원장이 “환상형 순환출자를 단계적으로 해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공식화하자 재계는“오히려 출총제보다 더 심한 규제”라며 출총제의 조건 없는 폐지를 주장해왔다.
1~2주 전까지만 해도 공정위와 재계는 서로의 입장을 전혀 양보하지 않은 채 팽팽한 모습을 이어갔다. 공정위는 각 그룹별 순환출자 해소를 유도하기 위한 세제혜택, 3~5년 정도의 순환출자 해소 유예기간 부여 등 구체적인 대안을 검토했다. 순환출자 해소가 어려운 그룹, 비교적 쉬운 그룹, 또 순환출자를 해소했을 때 그룹 별로 바람직한 지배구조 재편 모습까지 그려 놓았다. 권 위원장은 “출총제 적용을 받는 14개 재벌 중 순환출자 해소가 어려운 곳은 4곳 뿐”이라며 순환출자 해소방안이 비현실적인 정책이 아님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정위의 이러한 거침없는 행보는 재경부와 산자부 등 관련부처와 정치권, 보수 언론 등이 재계 입장을 옹호하고 나서면서 협의 과정에서 난항을 겪어왔다. 권 부총리가 공개적으로 “공정위 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고, 수 차례 진행된 권 부총리, 권 위원장, 정세균 산자부 장관의 협의는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한 자리였다. 결국 공정위 안은 상당한 후퇴가 불가피했다.
그러나 아직 속단하긴 어렵다. 노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당정 협의 전까지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하지 않을 방침”이라며 “그 사이에 의견 조율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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