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4월14일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에서 열린 마스터스 4라운드. 3라운드 합계 203타로 2위 닉 팔도에 6타 앞선 그렉 노먼의 우승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1995년 브리티시 오픈 우승을 빼고는 메이저대회에서 7번이나 준우승에 머물렀던 노먼이 이번만은 매 라운드 선두를 지킨 '완벽한 우승'을 이룰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팔도의 추격전이 불붙으면서 노먼의 징크스는 재발했다. 노먼은 자멸했고 팔도는 역전우승을 했다. 이때 언론들은 노먼이 다 잡은 승리를 스스로 무너져 놓쳤다며 'Normanify'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 이 대회에서는 'Tigerization'이란 또 다른 신조어가 탄생했다. 골프황제 잭 니클러스가 타이거 우즈와 연습라운드를 한 뒤 "앞으로 20년간은 우즈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극찬했는데, 필 미켈슨, 데이비드 듀발 등 당대 최고의 골퍼들이 우즈와의 라운드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을 두고 언론이 만들어낸 말이다.
우즈와 한 조가 되어 라운드를 했던 닉 팔도는 우즈의 스윙을 보곤 "번개를 맞은 기분'이라고 실토했다. 이후 수많은 프로골퍼들이 타이거 우즈와 라운드를 하면 주눅 들어 제 실력을 발휘 못하는 '우즈공포증(Woodsphobia)'에 시달리고 있다.
■ 양용은(34)이 12일 중국 상하이에서 끝난 유럽프로골프투어와 아시아프로골프투어를 겸한 HSBC챔피언스에서 우승했다. 그의 우승이 대서특필 되는 것은 세계 랭킹 1위 타이거 우즈와 2위 짐 퓨릭, 6위 레티프 구센 등 강호들이 총출동한 대회에서의 값진 우승이기 때문이다.
선두 구센에 2타 뒤진 채 4라운드에 나선 그는 구센은 물론 우즈 퓨릭 등의 추격을 뿌리치고 역전 우승을 일구어냈다. 한국선수가 유럽투어에서 우승한 것은 최경주 위창수에 이어 세 번째지만 타이거 우즈가 참가한 대회에서의 우승은 처음이다.
■ 1996년 프로에 데뷔한 양용은은 국내에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투어에서는 4승을 거두어 정상급으로 통하지만 국내 투어에선 2승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가 세계 강호들을 물리쳤다고 해서 기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다.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비결은 '잡초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고난을 헤쳐온 그에겐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 대한 공포감이 있을 턱이 없다. 천하의 우즈라 해도 상대가 의식하지 않는다면 공포가 될 수 없다.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사람에게 두려움은 존재할 수 없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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