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선거를 얼마 앞두고 미 국무부의 한 관계자가 “부시 대통령은 선거에 져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소 뜻밖이었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책 노선이 좋아서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반감과, 선거 패배가 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읽혀지는 발언이었다.
●중간선거 이후 고무적 제스처
그러나 그는 뒤이어 “아무리 그래도 부시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드러냈다. 전자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희망사항이었다면 후자는 그가 부시 대통령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진짜 예측이었던 것이다.
7일 중간선거는 치러졌고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은 12년만에 상ㆍ하 양원 지배권을 모두 민주당에 내주는 참패를 당했다. 그런데 꿈쩍도 않을 것 같던 부시 대통령이 선거 바로 다음날 이라크전 실패 책임자로 지목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경질을 전격 발표했다. 민주당 지도부와 식사를 함께 하면서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는 등 유화 제스처도 이어졌다.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어쨌든 현재로서는 앞서의 예측이 빗나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환영할만한 일이다. 정확한 표현은 물론 아니나 부시 대통령이 ‘정신을 차리면’ 국제사회는 그것만으로도 많은 새로운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도 그러한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하는 처지에 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북핵 6자회담의 재개가 예고된 상황에서 대북 협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민주당이 득세한 것은 분명 고무적이다.
부시 정권은 설사 6자회담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가 예전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북미 양자대화를 촉구하고 있는 민주당의 눈초리가 6자회담에서 북측에 제시할 부시 정권의 협상안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얘기다.
6자회담 교착이 북한 핵실험으로 이어진 일련의 악순환에서 중요한 빌미가 됐던 대북 금융제재 문제에 있어서도 법적인 엄격함보다는 정치ㆍ외교적 판단에 더 무게가 실릴 가능성도 있다. 럼스펠드 장관의 퇴진은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등 한미동맹 재조정 현안과 관련한 미국의 입장이 한결 유연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기회 활용 여부가 더 걱정
하지만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한국이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준비가 돼 있는지 여부다.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미 민주당의 승리를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면서 여야가 저마다 자신들의 국내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입씨름이 한창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미국이 움직이면 한국도 움직여야 한다고 본다. 너무 오른쪽으로 갔던 미국이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한국은 북한 핵 폐기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조금은 오른쪽으로 옮겨 앉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을 움직이고 북한을 다루는데 보다 정교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포용정책은 미 공화당보다는 민주당과 훨씬 궁합이 맞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민주당은 다름아닌 ‘미국’의 민주당임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과연 정말로 부시 대통령은 정신을 차린 것일까.
고태성·워싱턴 특파원 tsg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