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명사 59인의 고백 "그대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다"도종환 등 지음 / 한국일보 발행ㆍ204쪽ㆍ9,800원
세상의 변화가 참 빠르다. 거기에 맞추려다 보니 우리의 일상 또한 정신없이 흘러간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나를 돌아볼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이 허둥대는 게 지금 우리의 삶 아닐까. 그러나 그럴수록 새록새록 떠오르는 소중한 기억들이 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일> 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있다. 내>
필자는 우리 사회의 명사 59명. 얼마 전 타계한 이겸로 통문관 설립자, 역사학자 이이화씨, 철학자 윤구병씨, 구효서 박범신 이문구 이순원 한승원 작가, 김용택 김정환 도종환 시인, 윤형두 범우사 설립자, 강맑실 사계절 대표, 가수 김창완, 정일성 촬영감독, 이명박 서울시장, 박찬석 열린우리당 의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이근후 열린마음클리닉 원장,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 한의사 김홍경씨, 고인경 파고다외국어학원 원장, 이만기 인제대 교수, 강동희 원주동부프로미 코치,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전 대표, 이찬승 능률교육 대표, 권동칠 트렉스타 대표,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자, 문국현 유한킴벌리 대표 등이다.
영화 <서편제> 에서 판소리를 선보인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은 명창 박보화씨를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들른 김제국악원. 박씨는 갸름한 미인형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판소리를 배우는 소녀들에게 험악한 욕설과 질책을 쏟아내고 있었다. 몇 년 후 다시 찾은 그곳. 하지만 더 이상 박씨는 없었다. 그 사이 간암으로 사망한 것이다. 판소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그 여인의 차갑고 그늘진 검은 얼굴과 맑고 고우면서도 구슬픈 목소리는 아직도 그의 기억에 남아있다. 서편제>
국립암센터 의사 서홍관씨는, 급성백혈병으로 어린 동생을 먼저 보낸 의예과 1학년 시절을 떠올렸다. 몇 년 뒤 본과 3학년이 된 어느날, 실습실에서 백혈병 환자를 위해 자진해 자신의 피를 뽑아준 그는 잠시 후 강의 시간에 어지러워 엎드려 있다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불현듯 먼저 떠난 동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조재현씨는 아들에게 최고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몇 년 전 쇼트트랙 경기에 나간 아들이 중도탈락하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링크 중앙에 서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데뷔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단역으로 나간 데뷔 작품에서,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온갖 욕설을 받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그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도 호된 신고식을 치른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아픔을 겪은 아들이 틀림없이 강하게 자랄 것이라는 믿음이 불쑥 솟아났다.
여행 연출가 김현씨의 결혼기는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 친구 부인의 여자 친구를 보고 반한 그는 그녀가 만나주지 않자 재직중인 학교로 쳐들어가 근처 호텔 스카이라운지로 데려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밀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청혼을 하자 그녀는 “죽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좋겠죠”라며 애교스럽게 청혼을 받아주었다.
원고지 다섯장 분량의 짧은 글들이지만, 거기에는 잔잔한 감동과 은은한 재미가 있다. 평생의 교훈이 있고, 두고두고 돌아볼 아름다운 사연이 있으며, 잔잔한 웃음을 주는 따뜻함이 있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읽고 ‘내가 잊을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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