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을 묻는 어른 봤어?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어떤 놀이를 좋아해? '나비 수집은 해?'하는 것 말이야. 대신 어른들은 이렇게 묻지. '몇 살이야? 형제는 몇이고?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 어른들이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전부야.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고 말하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해. 대신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아, 참 좋은 집이구나' 소리친다고."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1943)에 나오는 어린왕자의 푸념이다. 한국에서 살기가 싫어질 때면, 꺼내서 읽고 위안을 얻는다. "거봐. 우리만 그런 게 아니잖아. 1940년대 프랑스 사람들도 그랬다잖아"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애는 없고 온통 어른들뿐이다. 숫자가 아니면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 애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해'보다는 '그 애는 반에서 일등이야'가, '그 친구는 영어를 잘해'보다는 '그 친구 토익점수는 900점이야'가, '그 사람 성실해'보다는 '그 사람 일요일도 없이 매일 12시간씩 일해'가 훨씬 이해하기 쉽다.
세상이 온통 어른들뿐이다 보니, 정치 경제는 물론 문화까지 온통 숫자 늘리기, 순위 올리기에 '올인'한다. 정치가들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경제성장률 7%' 등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고, 기업인들은 회사의 기초를 튼실히 하기보다는 코앞에 매출액을 끌어올리기에 급급하다.
영화인들은 작품의 질을 높이는 데 써야 할 돈을 쪼개 바람몰이 홍보용으로 쓰고, 대학교수는 공부할 시간을 쪼개 논문 편수를 늘린다.
하지만 숫자가 다는 아니다. 경제는 원래부터 숫자노름이라고 우긴다면 굳이 버티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문화는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올랐지만, 16강 진출에 실패한 아르헨티나보다 한국이 축구를 잘한다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 광화문에 100만 명이 모였고, 시청률이 95%를 넘겼다는 자부심은 '축구는 인생'이라는 영국인의 말 앞에 부끄러워진다.
100만 권씩 팔린 베스트셀러가 1,000권도 팔리지 않은 학술서보다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관객을 1,000만 명 동원한 상업영화가 극장을 잡지 못해 개봉조차 못 한 예술영화보다 작품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집값이 두 배 뛰었다고, 주거환경이 두 배 나아진 것은 아니고, 해방 이후 국민소득이 243배 증대했다고, 삶의 질이 그만큼 높아진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교양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빼먹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졸업하기 전까지 고전을 100권씩, 200권씩 읽히겠다는 것이다. 고전을 안 읽어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논어와 맹자를, 칸트와 헤겔을, 도스토옙스키와 프루스트를 학생들이 무슨 수로 1~2주에 한 권씩 읽을 것이며, 그렇게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숫자는 단지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숫자로 판단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숫자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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