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조화인가, 가을 하늘은 내 필력으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에메랄드빛을 띈다. 첫 서리가 내린 후로 더 앙상해진 나뭇가지 저 꼭대기 위로 감 한두 알이 빠알간 인주마냥 푸르른 하늘에 선명한 도장 하나 콱 박아놓는다. 나뭇가지에 홍일점으로 매달려서 이따금 부는 바람에 고개를 살래살래 저어 시선을 잡는 모양새가 요염하기까지도 하다.
● 생명 살피는 한국인 정서 놀라워
그 한두 점의 당돌한 붉은빛이 지난 여름의 풍성함을 기억하도록 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해서 사진 속에 찰칵 담아 자랑스레 제자들에게 보여주었는데 아이들이 '까치밥'이라고 일러주었다.
국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까치밥'의 의미를 제자들의 입을 통해 헤아리고 나서 나는, 한국인들의 국민정서 이해에 대한 나의 부족함과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게으른 농부의 탓이리라, 배부른 농가의 소홀한 추수이리라고 무심코 바라본 이 한두 알의 붉은 과일이 글쎄 새들을 위해 남겨둔 월동 음식이라고 한다. 그것도 '까치밥'이라는 익살스러운 이름까지 붙여서 말이다.
"새들도 먹고 살아야지!" 걱정도 팔자인 이 사랑스러운 정서를 지닌 사람들에게 생명체의 한 개체로서 그 무슨 말로 감사함을 다 표할 수 있을까!
싱글로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늦게 귀가하는 식구를 위해 음식을 어느 정도 남겨두는 정도의 미덕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여서 행여 굶고 들어오는 식구들이 있을까봐 밥상을 차리기 전에 미리 음식을 따로 덜어놓곤 한다.
한 가족으로서 식구들의 불편함과 필요함을 미리 살피는 마음,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배고픈 시절이나 먹을거리가 풍부해진 지금이나 변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마당에 심어 놓은 나무 몇 그루에 뛰어놀던 까치나 참새와 같은 미물들을 위해, 이들이 배고플 수도 있는 추수 후를 위해, 과일 몇 개나마 남겨둔다는 것은 나로서는 참으로 생소한 '베풂'이 아닐 수 없었다. 내생에 새로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아야겠다.
사람끼리 식구끼리 서로 아껴주는 마음을 '인간애'라고 한다면, 새들까지 챙겨주는 '까치밥'의 마음은 '연민'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신보다 약한, 자신보다 덜 가진 자를 위해 베풀 수 있는 마음. 한국에서는 늦가을 하늘에 붉게 핀 '까치밥'으로 표현된다.
내것을 챙기면서 타인을 위해 조금이나마 그 결실을 나누어 주는 미덕, 그것은 상여금을 타고서 동료들을 위해 한 턱 내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기분 좋으니 한 턱 내는 것쯤이야.
● 사람 위해서도 까치밥 같은 연민을
허나 타인이 내게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우리는 대부분 질타의 칼날을 세우기 급급했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타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연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를 무척이나 어려워하지 않았던가?
화를 다 내고서 그 다음에야 자신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는지 반성이 들 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니 이 생을 살면서 우린 그 누군가에게 몇번이나 '까치밥'을 남겨주었던가.
새들을 위해서만이 아닌 우리 사람들을 위해서도 '까치밥'을 주자!
추이진단(崔金丹)ㆍ 대진대 교양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