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한국인의 성격과 문화적 특성 때문에 화병(火病)은 이미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병명이 됐다. 화병은 ‘분노 증후군’으로 불리는데 정신적으로 약해지고 여러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자신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을 때 발병하는 신체적 증상을 통칭해 부르는 말이다. 보통 얼굴, 목, 가슴에 불이 나는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이 차고 기운이 떨어지고 소화가 잘 안되며 명치에 뭔가가 달려 있다고 호소하는 등 증상도 참 다양하다.
하지만 이러한 증상으로 내원하는 환자들은 정신적으로 우울, 불안 등을 호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실제로 화를 참다가 신체적인 질병으로 발전한 경우도 많다. 화가 나도 표현하지 못하고 참아 가슴이 두근거린다며 병원을 찾은 환자를 검진한 결과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증과 같은 심혈관계의 문제가 발견되거나 화 때문에 속이 불편해 병원에 왔다는 환자에게선 위식도 역류질환이 나타난 경우도 있다.
아직 이와 같은 신체적 질환으로 발전하지 않은 단순한 화병이라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가 함께 겹쳐 있는지를 우선 확인한 후 약으로 다스린다.
화병은 우선 우울증 치료 약제인 항우울제를 처방 해 치료하는데 우울증 치료 때 보다는 훨씬 적은 용량을 복용해도 도움이 된다. 최근에는 부작용이 적은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계통을 가장 많이 처방하며 렉사프로, 프로작, 졸로푸트, 팍실 등이 주로 쓰인다. 이 약제들은 기존 삼환계 항우울제와 비교해 약효가 빠르게 나타나고 심혈관계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치료 초기에 식욕저하 및 체중 감소를 간혹 호소하기도 한다. 약물 사용기간 역시 우울증 치료보다 훨씬 짧은 3~6개월 정도면 충분하다.
화가 치밀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경우엔 항불안제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정신과에서 처방하는 항불안제 약물들은 부작용이 거의 없고 만성 스트레스에 의한 증상과 신경호르몬의 이상을 조절한다. 주로 처방하는 약물들로는 자낙스, 바리움 등이 있다. 이러한 항불안제는 치료 효과가 매우 빠르게 나타나지만 금단현상이 나타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심한 경우 약을 먹지도 않으면서 항상 휴대하고 다닐 정도로 심리적인 의존성이 커지는 경우도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항불안제나 수면제는 되도록 단기간 처방하게 된다. 화병도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전문가의 지도가 없는 약 복용을 삼가해야 한다.
이대 부속 동대문병원 임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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