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의 중간선거 참패의 후폭풍으로 전격 물러난 도널드 럼스펠드(74) 전 국방장관은 시대의 풍운아였다.
불과 30세의 나이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백악관 비서실장, 대사, 국방장관, 기업 총수에 이어 다시 국방장관에 롤백한 그의 경력은 미국 정계에서도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다. 중앙 정치의 경험이 적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구세대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에 기용됐다.
그는 ‘미국이 움직이면 세계가 따라간다’는 신념으로 부시 정권의 대외정책을 주도했지만 결국 이것이 자신은 물론 부시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화근으로 작용했다. 자유주의를 전파할 수 있다면 제국주의라는 오명도 마다하지 않았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도 든든한 후원자였던 럼스펠드 장관을 잃음으로써 위세가 급격히 추락할 수 밖에 없게 됐다.
1932년 시카고에서 부동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럼스펠드는 프린스턴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해군 복무를 거쳐 하원의원 보좌관으로 정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의 화려한 정계 경력은 1962년 30세에 일리노이주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활짝 꽃피웠다. 연거푸 4선에 성공한 그는 1969년 리처드 닉슨 정권이 출범하면서 백악관에 입성, 대통령 보좌관을 지낸 뒤 73~74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주재 대사로 일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이 물러난 뒤 들어선 제럴드 포드 정권에서 비서실장으로 중용된 뒤 1975년 43세의 나이로 미 역사상 최연소 국방장관에 올랐다. 럼스펠드와 함께 네오콘의 대부로 꼽히는 딕 체니 부통령과의 두터운 인연은 비서실장 시절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6년 대선에서 포드 대통령의 낙선 이후 민간기업 총수로 변신했다가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중동특사를 맡았고 1996년 대선 때는 밥 돌 후보의 선거를 돕는 등 공화당과의 끈을 계속 유지했다.
그가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1998년 발표한 이른바 ‘럼스펠드 보고서’ 를 통해서였다. 21세기 미국 군사전략의 대강을 결정할 초당적 의회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던 럼스펠드는 이 보고서에서 북한 이란 이라크 등 ‘깡패국가’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미사일방어(MD)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우주공간을 무기화 하기 위해 탄도미사일 협정을 사실상 파기하는 내용이어서 러시아로부터 ‘제2의 스타워즈’라는 엄청난 반발을 샀다. 또 중국을 21세기에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협할 국가로 지목하기도 했다.
2001년 조지 W 부시 정권이 출범하면서 국방장관에 다시 기용된 럼스펠드는 9ㆍ11 테러에 따른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기획하고 이끌면서 다시 한번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부시 정권 1기 때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비둘기파와 대외정책을 놓고 끊임없는 불화를 일으켰다.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신임을 바탕으로 2기 정권에서도 국방장관으로 남아 이라크 전쟁을 주도했지만 자신의 장담과는 달리 이라크 상황은 수렁에 빠졌다. 이라크전이 이번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의 패인으로 밝혀지자 결국 도중 하차했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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