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이승연씨가 진행하는 모 케이블 방송국의 토크쇼에 출연하게 되었다. 패셔너블한 그녀가 진행하는 ‘패션’에 관한 프로그램이었다. 음식으로 멋을 부리기는 하지만, 과연 내가 그 프로에 나가면 할 말이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출연했다. 녹화 당일, 몇 명의 촬영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연 씨와 나는 나란히 앉아 조심스레 말문을 텄는데.
진행자의 반짝이는 외모는 둘째, 소탈한 성격과 편안한 말솜씨에 반한 나는 나에 대한 ‘토크’를 줄줄 풀어놓기에 이르렀다. 두 여자의 수다는 ‘패션’에서 ‘음식’으로, ‘음식’에서 ‘가족’으로 넘어갔고, 나는 또 할아버지 이야기를 아니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 생전의 이런저런 일들을 추억하였더니 진행자가 한마디 거들어주었다.
“할아버님이 재은 씨에게 ‘정신력’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겨주셨군요.”
♡ 구운 주먹밥과 뜨거운 정종
사실 우리 할아버지는 별달리 남기신 유산이 없다. 이북이 고향으로 남쪽에 와 ‘맨땅에 헤딩’하며 일궈낸 경제력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곳 저곳에 ‘자선 후원금’으로 나눠주셨다. 할아버지가 금이야 옥이야 했던 첫 손주는 나, 장손은 내 남동생인데 그야말로 우리에게 콩 한 쪽 남기기 않으시고 돌아가신 거다. 물질적으로 보면 그랬다는 말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지 5년째가 되는 요즘도 툭하면 생각나는 할아버지. 특히, ‘밥’을 먹을 때 더 생각나는 분이다.
모든 전쟁세대가 그렇듯 할아버지는 ‘먹고 살만한’ 상황에 감사, 또 감사하라고 늘 이르셨다. 또, ‘일한 만큼만’ 먹어야 탈이 나지 않는다고도 강조하셨다. 부모는 나를 낳아주신 분들일 뿐, 이후 먹고 사는 문제는 순전히 내 몫이라는 가혹한 현실을 내 나이 일곱 살 때부터 가르쳐주신 분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할아버지는 ‘식사 시간’을 온전히 즐기셨다. 저녁식사에는 특히 ‘반주’한 잔을 거르지 않으셨는데, 요즘같이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이면 작은 주전자에 정종을 데워 곁들이셨다. 할아버지 식사시간은 두 시간! 내가 꼬마였을 때 노래했던 구절이다. 일일연속극이 시작될 때 저녁상을 받으시면, 아홉 시 뉴스가 시작 한 다음에야 상을 물리셨다. 밥 한 술, 찬 한 가지를 따끈한 정종에 곁들여 음미하셨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손주들 가운데 나만 물려받았다는 것이 웃기다. 남동생과 외사촌 남동생은 반주를 즐기지 않고, 여자 사촌들은 술을 못한다.
반주를 곁들여 천천히 식사하는 것은 서른을 넘으면서 굳어진 나의 습관. 할머니나 엄마가 차리시던 할아버지 진지상은 맞벌이 부부의 저녁에 어울리지 않고, 대신 간단하게 준비되는 구운 주먹밥과 된장국 정도가 마땅하다. 소금, 식초, 깨, 참기름으로 밑간하여 비빈 밥을 먹기 좋게 꽁꽁 뭉쳐서 팬에 구워낸다. 다시마 국물과 간장, 맛술, 물엿을 섞어 만든 양념장을 발라가며 구우면 더 맛나고. 밥을 구울 때 노릇노릇 바삭하면서도 타지 않게 하려면 불을 약하게 하여 진중하게 오래 구워야 한단. 간단하지만, 인내심이 필요한 메뉴다.
여기에 따끈하게 데운 정종과 무를 넣어 시원하게 끓인 된장국, 밑반찬 몇 가지를 곁들이면, 값비싼 이자까야(요깃거리와 꼬치류의 안주를 파는 일본식 술집) 부럽지 않다. 정종은 제사 때 쓰는 국산 정종을 소(小)짜로 사서 큰 냄비에 중탕으로 데우는 것이 맛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오뎅(어묵) 바(bar)’라는 형태의 주점이 인기인데, 이것 역시 집에서 얼마든지 재현 할 수 있다. 무, 다시마, 가다랭이포, 대파로 국물을 시원하게 뽑고, 거기에 갖은 어묵을 데워 내면 된다. 양만 넉넉히 준비하면 어묵 몇 꼬치에 시원한 국물, 따끈한 정종으로 조촐한 홈 파티를 열 수도 있겠다.
♡ 풋고추만 있어도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식습관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맛있다!”를 연발하는 것이다. 나는 남산길 돈가스를 먹으며 풋고추 하나만 아삭거려도 “아, 맛있다. 맛있어!”하고, 잘 지어진 밥 한술에 “맛있다!”, 잘 끓여진 라면 한 젓가락에도 “맛있다!”다. 떡볶이 노점에 앉아 “맛있다!”를 연발하면, 장사하시는 아주머니가 “새댁이 배고팠나 보네, 이런 걸 그리 맛있어 하고.”하신다.
‘맛있다, 맛있어’의 추억을 거슬러 오르면 맏며느리의 빈대떡에, 손녀딸이 대접하는 추어탕 한 그릇에 ‘음, 맛있구나, 맛있어’를 연발하시던 할아버님이 있다. ‘맛있다’고 뇌까리며 먹는 밥은 본래의 맛보다 더 맛이 있어진다. 이런 것도 자기 암시라고 해야 하나. 같은 메뉴를 시켜도 앞에 앉은 사람보다 번번이 더 맛있게 먹게 되는 입맛 나는 암시. 천천히 음미하면서, 맛있고 감사하게 먹는 습관을 물려받은 덕에 나는 풋고추 하나만 있어도 미식하는 노하우를 갖게 되었나 보다.
이는 비단 밥상에만 한정 된 일이 아닌 것 같다. 남과 같은 상황에서도 강한 자기 암시와 다짐을 통해 긍정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한 만큼 먹고, 소박한 밥상에 긍정적으로 만족하는 ‘위대한 유산’이 콩 한 쪽 남겨주시지 않은 할아버지가 숨겨놓고 가신 보물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음식 칼럼집 <육감유혹> 저자 박재은 육감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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