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엔 골목길 담벼락이든 전봇대든 어디에서나 '반공 방첩' 포스터와 함께 나붙은 '간첩식별요령'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자' '밤중에 라디오로 북괴방송을 듣는 자' '담뱃값 등의 물가나 지리를 잘 모르는 자' '무의식 중에 동무, 호상 따위의 북한식 용어를 쓰는 자' 등이 당장 떠오르는 내용들이다.
등하굣길에 곰곰 읽어 보곤 자못 진지하게 행인들을 살피던 기억도 있다. 지금에야 유치해 보이고 애꿎게 숱한 이들을 의심케 할 내용이지만 당시엔 실제로 간첩들의 운신을 좁히는 효과가 컸을 것이다.
▦ '간첩'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우리 사서는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략하기 전 은밀히 간첩으로 갈 자를 구한 끝에 도림이라는 승려를 뽑았다는 기록이다. 장수왕은 이후 도림으로 하여금 백제 개로왕을 부추겨 온갖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한 뒤 힘 빠진 백제를 기습해 마침내 개로왕의 목을 벤다.
첩자, 세작, 내첩 등 스파이를 일컫는 사서의 다른 용어들이 대개 정보탐지에 비중을 둔 표현인데 비해, 간첩은 상대의 틈(間)을 벌려 균열시킨다는 적극적 교란행위까지 내포한 개념으로 보인다.
▦ 전임 김대중 정부 이래 우리 의식 속에서 비켜나 있던 '간첩'이 갑자기 여기저기서 되살아나고 있다. 소위 386관련 간첩단이라는 '일심회' 사건은 묘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는 바람에 최종 수사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사실 더 충격적인 것은 최근 국회 국감장에서 불거진 경인TV 대표의 미국 스파이활동 주장이다.
근거로 공개된 문건은 한국의 현 정세를 다각도로 분석한 뒤 온전히 미국의 입장에 서서 한국 정부를 이렇게 저렇게 요리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이다.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명백한 반역행위다.
▦ 문제는 이 경우 법 적용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현행 형법 상 간첩행위가 성립하는 '적국'은 명백히 북한만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파악한 북한해군 잠수함의 침투경로를 한국측 인사에게 알려주었다는 이유로 재미동포 로버트 김이 10년 가까이 간첩죄로 복역한 사례에 비춰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수사기관이 적극 나서 주장의 진위를 분명히 가리되, 차제에 관련법들도 서둘러 정비해야 한다. 간첩행위로부터 국가공동체의 이익과 안위를 지키는 데는 시대가 어떻든, 상대가 누구든 예외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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