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증권의 고객이신 OOO씨는 이태원 길모퉁이에서 코지코너(Cozy Corner)라는 레스토랑을 하십니다. 직원 사이에서는 미인 사장님이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책 많이 읽는 사장님으로 통하지요."
한 시사주간지에서 맞닥뜨린, 삼성증권 광고 카피의 첫머리다. 보기에도 숨막힐 정도로 빼곡한 책들 사이에 서서 여성 모델이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가운데쯤, 그녀의 오른쪽 팔꿈치를 살짝 가린 채 쌓여 있는 책 다섯 권의 제목이 유난히 또렷하다. 다른 책들의 제목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광고 제작자가 이 다섯 권의 책에 포인트를 주려 했음이 분명하다.
● 증권광고로 쓰이는 반자본주의자들
위에서부터 차례로 <스콧 니어링 자서전> , <바가바드기타> ,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 <프란츠 파농> , <닥터 노먼 베쑨> 이다. 증권회사 고객의, 다시 말해 증권투자자의 독서목록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겠으나, 이 광고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책들이 증권의 세계와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닥터> 프란츠> 괴테의> 바가바드기타> 스콧>
힌두교 경전이나 괴테의 여행기야 시공을 뛰어넘은 '교양서'라 치자. 그러나 스콧 니어링, 프란츠 파농, 노먼 베순이라니. 외과 의사 베순과 정신과 의사 파농은 각각 중국혁명과 알제리혁명의 한복판에서 제 삶을 소진시켰다. 경제학자 니어링은 평화주의적 견해 때문에 주류사회에서 계속 내쳐진 끝에 만년을 '독립 농부'로 산 생태주의자다.
이들은 제가끔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살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했다. 이들 모두는, 적어도 생애 후반부엔, 어기찬 반자본주의자였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자본주의의 가장 뜨거운 상징이라 할 증권회사 광고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지난 세기 저물녘부터 손에 먹물 묻힌 자들이면 한 마디씩 거들곤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걸까? 그런 것 같진 않다. 한 때는 반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이름들을 자본주의 찬미에 써먹는 이 광고의 너그러운 우아함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자본의 먹성을, 이념과 체제의 전선에서 자본주의가 거둔 '최종적' 승리를 보여주는 것일 테다. 이 반항자들의 이름은 이 이름들이 저주했던 세계자본주의의 평안에 이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은 상품이나 기업의 이미지에 기품과 순정함을 부여하는 소도구로 봉사한다. 폭약이 제거된 파농이라는 이름, 베순이라는 이름, 니어링이라는 이름은 이 난만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그저 하나의 스타일로 소비되는 것이다.
소비되는 스타일로서 이 이름들보다 훨씬 많이 팔려나간 것이 체 게바라일 게다. 그의 얼굴이 박힌 티셔츠를 입고 그의 평전을 옆구리에 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들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좌파를 자임하는 지식분자는, 극우신문의 지면을 빌려, 게바라의 '진정성'을 본받아야 한다며 이 청년들을 계도한다. 자본은 이 모든 것을 그냥 놓아둔다. 게바라 티셔츠를 입은 거리의 청년들이든 극우신문에 얼굴을 들이미는 좌파 지식분자든, 그들에게 게바라가 스타일 이상은 아니라는 걸 자본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모든 걸 먹어치우는 자본의 허영
반자본주의적 이름들을 마스코트나 장신구로 삼아 소비하는 자본주의의 허영이 꼭 눈살을 찌푸릴 일만은 아니다. 응용심리학 전문가들이라 할 광고제작자들까지 군침을 흘릴 만큼 이 '불온한' 이름들이 끊임없이 소비된다는 것은, 가장 탐욕스러운 자본주의형 인간도 내면 한 구석에 공동체적 정의감각이나 생태주의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뜻한다.
유럽의 한 모랄리스트는 위선을 "악이 선에게 바치는 경배"라 정의했거니와, 증권회사 광고에 등장하는 <스콧 니어링 자서전> 이나 탈정치 세대가 걸친 티셔츠 위의 게바라 얼굴도 '자본주의적인 것'이 '자본주의 아닌 것'에게 건네는 경배라고 볼 여지가 있다. 그것이 인류의 가느다란 희망이다. '자본주의 이후'를 모의할 의지와 지혜는 바로 이 허영에서 나오리라. 스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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