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꿈꾸던 그때… 20년후 돌아온 편지
日誌 - 1
눈물같은 들풀을 꺾는다 손금 많은 바람들이
맑은 이마를 가리고 먼 데 술집 풍차의 흐린 불빛을
본다 허름한 그곳에서 생선비늘같은
사람들과 설을 맞는다 투명한 목울음이 흐르는
강가에 앉아 은어떼처럼 거슬러 오르는 詩를
쓰고 싶다 오랫동안 나는 술을
마신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횃대에 앉은 나의 닭 목을 비트는 꿈을 꾸는 새벽까지
1985年 2月 19日
日誌 - 2
정희야 오늘은 춥다
오십만원 돈 가슴에 안고 등록금 납부하는 날
목울대 가득히 깨꽃이 밀려왔다. 그리운 이들의
가슴 그렸다 어디론가 떠밀려가는 나의 섬, 떠도는 자
의 물풀처럼 나는 도심의 빨간 바다를 낯설게 건너왔다 문
득 뒤돌아보면 방안 가득히 자학과 자위로 혼자 노는 법을
익힌 강이 불투명하게 흘러가고 있다. 희고 고운 앞집 순이
의 치아처럼 고향 텃밭의 깨꽃들이 맑게 피어났다
차츰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1985年 2月 22日 형준
붙임: 仁川에 올라오면 연락 한번 해라 잘은 못해주더라도 따뜻한 가슴으로 만나고 싶다 편지도 한번쯤 해주고.
♡ 김다은의 우체통/ 고교문예대회서 만나 고민 나눠
‘형준’과 ‘정희’(장민하의 본명)는 1984년 인천대 주최 고교문예대회 수상자들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시에 대한 고민을 나눌 친구”를 열망하며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는다. 여기 소개된, 두 날짜가 적힌 한 통의 편지는 85년 서울예전에 합격한 ‘형준’이 재수생 ‘정희’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를 구실삼아 ‘형준’은 日誌, 매일 말로 뜻을 세웠다. 日誌 1은 ‘을/을, 은/는 이/지’같은 각운을, 日誌 2는 ‘떠도는 자/의, 문/득, 순이/의’같은 문법과 행의 단절을 통해 “떠도는 자”의 운율을 표현하고 있다. 10대 끝자락에서, ‘형준’은 편지라는 도가니에 펜 끝을 달구며 시를 담금질 했던 것이다.
20년을 훌쩍 뛰어넘어 장민하가 편지들을 내놓자, 박형준은 “병에 넣어 물에 띄운 편지”가 “멀리 시간의 바다를 향해 떠났다가 내게 돌아온 엉뚱하고 신비로운 느낌”이라고!
소설가ㆍ추계예술대 교수 김다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