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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6> 사전, 언어의 곳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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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6> 사전, 언어의 곳집

입력
2006.11.07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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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은 한 언어공동체가 쌓은 지식과 정보의 곳간이다. 사항사전(事典)이든 어휘사전(辭典)이든, 사전의 가짓수와 됨됨이는 그 사회 정신문화의 키를 보여준다. 사전은 또 18세기 프랑스 백과전서파가 보여주었듯, 계몽의 거점이기도 하다. 백과전서파의 고향에서 몇 철을 보내며 그 사회의 사전 편집증을 엿본 적이 있다. 어원사전만 하더라도 세계 최대 규모라는 두 권짜리 <프랑스어 역사 사전> (알랭 레 책임 편집, 르로베르 사전출판사)을 시작으로 중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호주머니판 사전들까지 여러 종류가 나와 있었다.

각종 이름 사전(프랑스어의 땅이름 사람이름 강이름 따위의 기원을 밝혀놓은 사전)에서 시작해 유의어 사전(뉘앙스사전), 연상어(聯想語)사전, 발음사전, 각운(라임)사전, 사투리사전, 외래어 사전을 거쳐 각 분과학문별 술어사전, 직업별 계층별 은어사전 전문어사전과 욕설사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인들은 제 언어공동체에서 채집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사전 속에 체계적으로 갈무리해 두고 싶어하는 듯 했다.

프랑스인들 못지않은 사전 편집증이 일본인들에게도 있는 것 같다. 어떤 언어나 분야에 관한 최대 규모, 최고 수준의 사전은 그 해당 언어공동체가 아니라 흔히 일본에서 만들어진다. 프랑스인들이나 스위스인들은 생각하지도 하지 않고 있던 <소쉬르 언어학 사전> 이 일본에선 오래 전에 나왔다. 또 일본인들은 미국인들보다 먼저 <촘스키 언어학 사전> 을 편찬했다.

눈길을 나라 안으로 돌리면 마음이 스산하다. 분과별 술어사전이야 그 사회의 총체적 학문 수준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니 일단 접어두자. 버젓한 한국어 어원 사전 한 권 없는 것도 사전 편찬자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어원 사전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언어사 연구가 꽤 두툼하게 축적돼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어사는 아직 그 분야 전문가들에게도 속살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최대 규모의 어원사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이래의 역사비교언어학 연구가 인도-유럽어를 중심으로, 특히 프랑스어를 포함하는 로만어(고대 로마의 라틴어에서 분화한 언어들)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든든한 뜻풀이 사전도 드물다. 근자의 묵직한 사전들에선 꽤 달라졌으나, 이름난 출판사에서 이름 있는 한국어학자를 감수자로 내세워 출간한 사전도 용례 하나 싣지 않은 표제어들로 건조하게 채워져 있다. 독자들은 제가 모르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봐도 그 뜻을 어렴풋이 알게 될 뿐, 그 뉘앙스를 짐작할 수도 없고 제 글에 그 낱말을 안전하게 끌어다 쓸 수도 없다.

풀이도 대충대충이다. 특히 한자어 풀이는 일본어 사전을 베낀 흔적이 또렷하다. 한국어 사전 편찬자들은, 해방 뒤에도, 한자어의 뜻을 매기면서 (모국어의 실상을 관찰하는 번거로움을 피한 채) 일본어 사전의 풀이를 거의 옮겨놓다시피 했다. 그것은 20세기 한국의 언어민족주의를 이끌어온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 사전> 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사전에 실려있는)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의 한자어가 쌍둥이처럼 닮은 데는, 다른 언어적 언어외적 상황말고도, 한국어사전 편찬자들이 우리말 한자어의 뜻을 일본어 사전에 타성적으로 조회해 왔다는 부차적 이유가 있다. 한 언어의 어휘가 다른 언어에 차용돼 새 언어의 어휘장에 흡수되면 의미의 굴절을 겪는 일이 언어사에서는 흔한데, 개화기 이래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차용된 한자어들은 그런 의미 굴절을 거의 겪지 않았다.

지금도 한국어사전과 일본어사전에서 표제어로 내세운 한자어들은 거의 일치하고, 그 한자어 표제어들의 풀이 역시 놀라울 만큼 겹친다.

그것의 일차적 원인은 말할 나위 없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일본(어)이 한국(어)에 끼친 막대한 언어적 정치적 영향이지만, 한 낱말이 자국어의 의미장 속에서 어떤 값을 지니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기보다 그 낱말의 원산지에서 나온 사전을 손쉽게 베끼기로 결정한 우리 사전 편찬자들의 편의주의도 이 언어적 ‘내선일체’를 거들었다. 초창기의 한국어사전은 일본어사전을 베꼈고, 뒤이어 나온 한국어사전은 초창기의 한국어사전을 베꼈다. 사전 편찬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이런 편의주의를 칭찬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 문자의 창제를 기념하는 날이 따로 지정돼 있고 외래어 추방 운동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질 만큼 언어민족주의가 드센 사회에서 제 언어사전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빈약한 것은 얄궂다. 국어 사랑은 국어 사랑이라는 구호 속에 있지 않다. 그 사랑은 낱말 하나를 두고 몇날 며칠을 씨름하는 사전편찬자의 고뇌 속에 있다. 그 사랑은 또 정확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려는 언어사용자들 각자의 세심한 노력 속에 있다.

● 사전편찬인 박용수

품은 많이 들고 빛은 안 나는 일로 사전 편찬만 한 것을 찾기 어렵다. 사전 편찬은 끈기와 견딜성을 갖춘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오랜 세월을 보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또 지극한 언어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장시(長詩) <바람소리> (1984)의 시인 박용수(72)씨를 사전편찬인으로 만든 것도 모국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박용수씨는 국어학이나 사전편찬에 대한 전문 훈련을 받지 않았다. 받을 수가 없었다. 그의 제도교육은 진주고등학교 2학년 때 멈췄다. 그 전 해 발병한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국어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서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는 무덤 같은 고요 속에서 모국어의 살을 더듬으며 시인이 되었고, 마침내 그 모국어를 갈무리하는 사전편찬자가 되었다.

박용수씨는 시인과 사전편찬인 사이에 또 하나의 중요한 경력을 지녔다. 그는 1970~80년대의 사진작가이자 사진저널리스트였다. 의회가 아니라 거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가 이뤄지던 그 시절, 박용수씨는 바로 그 정치의 현장에 있었다. 군사파쇼정권에 맞서는 집회와 시위가 있는 곳마다 카메라를 든 그의 모습이 보였다. 박용수씨는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육박전을 차갑게 바라보는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라, 뜨거운 심장으로 민주주의 편에 선 참여적 관찰자였다. 그는 1980년대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중앙위원 겸 보도실장이라는 직책을 맡기도 했다.

한국 민주주의가 기지개를 켜던 1989년, 박용수씨는 <우리말 갈래사전> 을 내 놓았다. 900쪽이 채 안 되니 사전으로서는 크다 할 수 없지만, <우리말 갈래사전> 은 한국어사전 편찬의 역사에서 획기적 의미를 지닌다. 박용수씨는 이 사전을 통해서 한국어 분류사전의 영역을 개척했다.

유럽에서는 흔히 이미지사전, 주제사전, 연상사전이라고도 부르는 분류사전은 어떤 단어의 뜻을 몰라 찾아보는 사전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개념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거나 생각나지 않을 때 찾아보는 사전이다. 분류사전에서, 단어 뭉치는 주제별로 분류되고 최하위 주제 아래 묶인 단어들만 가나다순으로 배열된다. 예컨대 <우리말 갈래사전> 의 의생활(衣生活) 항목은 ‘길쌈과 옷감’, ‘바느질과 옷, 손질’, ‘매무시와 신변용구’, ‘신’을 그 하위갈래로 삼은 뒤, 그 하위갈래 안에서 의미 연관을 지닌 단어들을 가나다순으로 배열했다.

분류사전은 글읽기를 돕는 사전이 아니라 글쓰기를 돕는 사전이다. 박용수씨 표현으로는 ‘작문용 사전’이다. 글쓰기가 직업인 사람은 이런 사전의 필요성을 늘 느낄 것이다. 박용수씨가 이런 분류사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마침내 편찬한 것은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과도 관련 있을 테다. 1989년, 시인이기도 했던 고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면서 김일성 주석에게 줄 선물로 가져간 것이 바로 박용수씨의 <우리말 갈래사전> 이었다.

혼자서는 더 큰 규모의 사전을 편찬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박용수씨는 1990년 사단법인 한글문화연구회를 만들어 연구원들과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겨레말 갈래큰사전> (1993)과 <겨레말 용례사전> (1996)이다. 한글문화연구회는 <겨레말 갈래큰사전> 의 표제어 수를 늘리고 구성을 더욱 체계화면서 사이버 공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편찬이 이뤄지고 있는 <자연어검색 전자갈래사전> 과 <만능국어사전> 은 전자사전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만능국어사전> 은 어떤 표제어가 그 자연언어 안에서 맺는 모든 연관과 그 용례를 한 눈에 보여주는 사전이다. 이를테면 ‘사람’이라는 표제어를 찾았다 치자. 여느 사전이라면 ‘사람’의 뜻풀이와 용례를 보여주는 정도로 그칠 것이다. 갈래사전이라면 여러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들을 구조적으로 배열할 것이다. 그러나 <만능국어사전> 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사전은 여기에 더해 ‘사람’의 파생어, 합성어, 유의어, 반의어와 더 느슨한 수준의 온갖 연관어들을, 거기서 더 나아가 문법적 결합관계(통사관계) 따위를 세밀히 보여준다.

다시 말해 거의 모든 종류와 체제의 어휘사전을 한 책에 담아놓는 것이다. 종이사전으로라면 표제어의 연관어까지는 보여줄 수 있어도, 표제어의 연관어의 연관어의 연관어… 를 곧바로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 편찬자들의 <우리말 글쓰기 연관어 대사전> (2006)은 <만능국어사전> 의 개념에 닿아있지만, 그처럼 방대한 규모(자음 편 1942쪽, 모음 편 295쪽)의 일급 연관어 사전도 종이사전의 물질적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편찬자가 모아 쟁여놓은 모든 언어정보를 유기적으로 잇기에는, 클릭 한 번으로 이동이 가능한 전자사전이 한결 편리하다.

<만능국어사전> 은 어쩌면 박용수씨 생전에 완성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사전은, 본질적으로, 완성될 수 없는 운명이다. 사전에는 결정판이라는 게 없다. 개정 증보는 모든 사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냇?증보에 민첩할 수 있다는 것은 전자사전의 큰 장점이다. 종이사전이든 전자사전이든, 사전편찬은 끈기 못지않게 돈이 드는 일이다. 정부 부처나 독지가들이 <만능국어사전> 편찬에 눈길을 건넸으면 한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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