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이었던 1983년 어느 가을 밤. 나는 내방의 유리창을 꼭꼭 닫고 커튼까지 쳤다. 이어 형광등을 껐다. 칠흑같이 어두워진 방에서 라디오와 손전등을 더듬더듬 찾아서 침대로 가져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손전등을 켠 뒤 라디오의 검은 스위치를 'ON'에 맞췄다. 그리고 노란 스위치를 'FM' 'AM' '단파' 가운데 단파에 놓고 둥근 주파수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채널은 한 곳에 맞춰졌다.
'띠 띠 띠 띠~.' 밤 12시 시보가 울리자 라디오는 "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입니다"라는 말을 토해 냈다. 친구들로부터 이런 방송이 이 시각부터 새벽까지 계속된다는 얘기는 수없이 들었지만 막상 통혁당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런 방송 듣다가 걸리면 감방 가는 시대였다.
콜 사인에 이어 통혁당가가 나왔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오늘은 남한 자생혁명조직 통혁당의 ○○○씨가 남한혁명론을 강의하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날렸다. 잠시 후 강의가 시작됐다.
예상 외로 북한의 '혁명적 어조'가 아닌 서울 말씨였고 남조선이라는 표현 대신, 남한이라는 용어를 썼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북한은 이 방송을 평양에서 내보내면서도 남한의 혁명세력이 남한 내에서 지하방송하는 것으로 위장했다.
○○○씨는 먼저 '한줌도 안 되는 식민지 남한의 매판세력'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전두환 도당은 미국이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추종하는 식민지 정권입니다." (그래, 그런 점이 있지. 그런데 식민지라니? 우리가 미국한테 먹혔나?)
그의 다음 주제는 '남한은 반봉건사회'였다. "남한은 미제의 책동과 남한 군사정권의 매판적 성격으로 민족민주정권이 수립되지 못하고 봉건제도가 온존하고 있습니다." (전제군주시대를 방불케 하는 독재가 판치는 것을 보니 그런 것도 같네. 그런데 반봉건사회라니? 우리가 봉건시대의 지주와 농노인가. 그 정도는 아닌데.)
3시간 정도 강의를 노트에 기록한 뒤 다시 읽어 보았는데 느낌은 문자 그대로 반신반의(半信半疑)였다. 그리고 라디오를 다시 켰는데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그이께서는 솔방울로 총알을 만드시고…"라는 유명한 얘기였다. (어이구? 김 주석을 임금님 모시듯 하는 너네가 반봉건사회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친구들을 만나 "방송 들어보니 그거 완전히 아니던데"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에 빠져 매일 방송 듣는 대학생들이 늘어 갔다. 나는 방송 몇 시간 들으니 거짓말인지 알겠던데 참 이상했다. 주사파는 이후 공산권 붕괴와 우리사회의 민주화 속에 급격히 퇴조했지만 아직 이 사상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 국정원이 친북조직 일심회 사건을 수사 중이다. 국정원은 주사파 간첩단이라고 하고 자신들은 날조라고 한다. 이 논란에 관계없이 이들이 북한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사상을 공유해 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간첩조직이 실제로 갖춰졌는지, 북한의 지령을 받고 보고를 했는지, 북한과 접선했는지 등 법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이 말 한마디는 꼭 해 주고 싶다. '당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대중의 눈으로 북한의 주장을 다시 봐라. 그러면 거짓말이 보일 것이다.'
이은호 사회부 차장대우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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