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의 아르코미술관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드로잉 에너지> 라는 이름으로 3일 개막한 이 전시는 드로잉의 달인이라고 할 만한 중진작가 10명의 단체전인데, 전시 내용이 좀 색다르다. 드로잉>
우선 드로잉의 전통적 개념에서 탈출했다. 흔히 드로잉 하면 떠올리는 소묘나 스케치 같은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장르가 뭐든 간에 드로잉의 본질 즉 다분히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작가들은 종이나 벽면 드로잉 뿐 아니라 설치, 영상, 조각 등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드로잉적인 자유를 실천하고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 또한 거창하거나 어렵지 않다. 대부분 일상에서 건진 극히 개인적이고 모호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수다 떨 듯 펼치고 있다. 공중에 매달린 길이 54m의 거대한 소용돌이 판에 온갖 잡화성 드로잉을 채운 김을의 설치작품 <와(渦)> 가 대표적이다. 돌돌 말린 벽면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하는 이 작품은 시작도 끝도 없는 수많은 이야기 혹은 심각한 질문을 폼 잡지 않고 던진다. 와(渦)>
드로잉의 개념을 확장하다 보니 ‘어, 이게 왜 드로잉이야’ 싶은 작품도 있다. 함연주는 자신의 머리카락 한올한올로 그물망을 짜서 천정에 매달았다. 송진을 발라서 이슬 맺힌 거미줄 샹들리에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약한 조명을 받아 벽에 섬세한 그림자를 그려낸다. 다세대 주택 옥상에 텃밭을 가꾸는 배종헌은 직접 만든 농기구와 텃밭 일지, 농작물 성장 과정 드로잉, 주택 옥상 모양의 시멘트 구조물, 영상 등으로 <천상의 농부> 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김태헌은 16절지 크기의 캔버스 드로잉을 책장 가득 꽂아서 뽑아보게 했고, 누구든 편안히 앉아서 쉬라고 의자와 책상도 직접 만들어서 갖다 놓았다. 황혜선의 드로잉은 하얀 실리콘으로 흰 벽에 그려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전화기, 그릇, 가방 등 일상 기물을 최소한의 선으로 거대하게 윤곽만 표현함으로써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물방울 모양으로 뚫린 문으로 들어가 안쪽 벽 꼭대기를 보면 실리콘 드로잉의 수도꼭지가 있는 것도 재미있다. 이밖에 이기칠, 이미혜, 이순주, 임동식, 임자혁 등 다른 작가들도 유머, 솔직함, 생뚱맞음, 진지함, 예민함, 성실함 등을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천상의>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형미 큐레이터는 “드로잉은 특정 장르나 조형어법이기 이전에 정신적 태도이자 방법론”이라며 “어디에도 멈추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출발하는, 무한한 생성의 에너지가 드로잉의 본질”이라고 설명한다. 왜 지금 드로잉을 다뤄야 할까. 그의 분석은 이렇다. “현대미술은 온갖 시도를 해봤지만, 우리는 거대한 담론과 난해한 개념 작업에 피로를 느끼고 있다. 드로잉에 주목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려는 게 아닐까?”
전시는 12월 14일까지. (02)7604-598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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