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이 있었다. 북핵, 한미FTA, 비전2030, 부동산 문제에 이어 민생개혁 입법을 거론했고, 그 말미에 국민연금 문제를 끼웠다. "마음이 무겁다.
국회와 정부가 함께 결단하고 국민의 이해도 함께 구하자"고 했다. 전체 내용의 2% 정도였고 어조도 유순(?)했다. 노 대통령은 왜 이다지 국민연금 문제에 소극적이고 인색한가. 민생과 관련해 부동산 문제가 심각한 건 사실이지만, 연금개혁이 그보다 결코 덜하지 않음은 이 정부가 너무나 잘 알지 않은가.
● 후보시절 발언 과감히 번복해야
참여정부가 출발하며 내건 민생개혁의 양대 기치는 서민을 위한 집값안정과 장래를 위한 연금 개편이었다. 열린우리당과 정부는 '목숨을 걸다시피' 문제해결에 매달렸다. 하지만 대통령의 심정은 달라 보였다.
부동산 문제에 대해 노 대통령은 "모든 역량을 다해" 당정을 독려했다. 너무 심하게 닦달하는 바람에 당 내에서 불협화음이 일고, 담당 장관은 거의 정신적 공황에 빠질 지경이 됐다.
하지만 연금문제에 대해 대통령은 '당정이 알아서…'하는 식으로 일관했다. 흔한 자극적 독려나 적극적 언사도 없었다. 부동산 문제에서 당정을 몰아붙이던 기세의 반, 혹은 반의 반만 할애했어도 개혁법안은 일찌감치 국회를 통과했을 것이다.
혹시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스스로 언급했던 발언에 발목이 잡혀 그런다면 이제라도 그것을 과감히 털어야 한다. 2002년 대선 당시 TV토론에서 이회창 후보가 "국민연금이 지금 상태로 가면 2034년엔 적자, 2048년엔 파탄이 난다. 더 내고 덜 받는 구도로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노 후보는 "수지를 맞추기 위해 연금을 깎아버린다면 그것은 연금제도가 아니라 용돈제도가 된다. 또 2048년까지 예측한다는 것은 너무나 불확실하다"고 반박했다.
이 내용은 현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들이 퍼뜨리는 것이겠지만, 인터넷이나 언론에서 국민연금 관련 대표적 검색항목으로 공개돼 있다. '오기와 독선'이란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이 한 말에 집착하는 노 대통령이 이를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현재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연금개혁의 내용이 자신만만하게 반박했던 야당 후보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노 대통령이 '알아서 해 주었으면'하고 맡겨 놓은 정치권과 정부의 현실은 어떤가. 우선 여야는 당의 정체성까지 망각한 채 반대를 위한 반대의 고리에 갇혀 버렸다.
양극화 해소를 주장하는 열린우리당이 기초연금제 대신 재정안정화를 추구하고, 감세정책을 우선시하는 한나라당이 기초연금제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더구나 '더 내고 덜 받자는 데 앞장서면 표가 떨어진다'는 계산 때문에 여야 누구도 연금개편을 선창하지 못한다.
"개혁성과 소신으로 연금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라는 임명장을 받은 장관이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해결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지만 여권마저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특수직역연금과 동시에 개혁한다면 다소의 손해를 감수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데도 내부 반발을 우려한 해당 장관들은 의견 수렴과 분위기 조성을 핑계로 세월만 죽이고 있다.
● 잠시 욕 먹을 각오만 돼 있다면
해야 하는 것이라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대통령과 국민이 정치권과 정부를 압박하는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이 흔쾌히 후보 시절의 주장을 털고 국민에 대한 직접 호소에 나서야 한다. 국민 설득은 노 대통령의 특장 중의 하나 아닌가.
그 말을 바꿨다고 비난할 사람은 많지 않을 뿐더러 설사 욕을 좀 먹더라도 그게 뭐 대수인가. 시쳇말로 이왕 버린 몸, 인기 몇% 더 떨어지면 어떤가(절대 비아냥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노 대통령이 연금개혁 문제에 발벗고 나서 마무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 더구나 평가는 10년, 20년, 그 후까지 이어지지 않겠는가.
정병진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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