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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읽다]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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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읽다]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 <下>

입력
2006.11.0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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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하이젠베르크-보어의 핵폭탄에 대한 대화 담겨 있어

2차 대전을 끝장 낸 원자폭탄은 현대 과학의 힘을 증언하는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원자폭탄은 왜 연합군에서 먼저 개발됐을까? 연합군은 독일이 선수를 칠까 전전긍긍했지만 정작 독일의 기술은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주도의 미국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는 내로라하는 천재 과학자들을 끌어 모은 덕분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079) 자신과 그가 이끈 독일 연구팀도 그 못지않은 인재들이었다. 전선(戰線)의 양편에서 원폭 개발 경쟁을 벌인 그들은 모두 전쟁 전에는 함께 원자의 비밀을 캐던 동료였다.

1941년 하이젠베르크가 덴마크 코펜하겐을 방문, 스승 닐스 보어와 나눈 핵폭탄에 대한 대화는 역사가들의 큰 관심사다. 전후 전범(戰犯)으로 체포된 하이젠베르크는 “애초 폭탄을 만들 의도가 없었다”고 증언했으나 보어는 당시 하이젠베르크가 독일의 승전을 확신했고, 덴마크가 독일을 도와야 한다고 시사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만남은 영국 극작가 마이클 프레인에 의해 연극 <코펜하겐> (2000년 뉴욕 초연)으로 만들어졌다. 연극은 여러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로부터 핵분열 공식을 알아내려 한 것이 아닐까? 반대로 독일의 원폭 개발 가능성을 드러내 미국을 재촉한 것일까? 아니면 전세계 물리학자들에 대해 다같이 원자와 핵에서 손을 떼자고 제안하려던 건 아닐까?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적 물리학 이야기인 <부분과 전체> (지식산업사)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어에게 이론은 물론 현실적으로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 연구가 옳은지 그른지 자문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려고 애썼다. 나로서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했다. (독일)정부에 원자폭탄이 이 전쟁에는 쓰이기 어렵다고 양심의 가책 없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어는 원폭 제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시사한 그 이상의 생각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전후 1947년 보어를 다시 만났을 때 “우리의 기억이 너무나 엇갈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많은 유럽 과학자들과 달리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으로 이민가지 않고 독일에 남아 갈등을 자초했다. 한때 이민을 고민했던 그는 노교수 막스 플랑크를 만난 뒤 이렇게 결심했다.

“플랑크는 파국이 지나간 다음 시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재난동안 젊은이들을 모으고, 꿋꿋하게 타개해 나가다가, 새롭게 재건하는 일이 플랑크가 말한 과제였다. 불가피하게 타협을 맺고, 이로 말미암아 지탄받을 일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과제였다. 해외에서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는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 좀더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과제가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독립운동가들도 이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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