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연구해온 이론을 현실세계에서 펼쳐보라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 같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3월 취임 직후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권 위원장은 이르면 이번 주중 대표적 재벌정책인 출자총액제한제도의 대안으로 환상(고리)형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방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공정위가 ‘순환출자 금지’라는 정공법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이상주의자’인 권 위원장의 소신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재벌 총수들이 계열사간 고리형으로 둥글게 연결되는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전체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순환출자 금지라는 본질을 피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러나 권 위원장의 ‘원칙론’에 대해 재계와 산업자원부 등은“현실을 너무나 모르는 이론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권 위원장은 학자 출신답게 직설화법을 구사한다. 3일 성균관대 특강에서 “총수 일가가 갖고 있는 지분은 5%밖에 안 되는데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마다 40~50개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며 “이런 소유구조로 한국에서 중소기업이 살아 남으려면 재벌 계열사가 되거나 협력사가 되는 방법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 경제의 약점”이라고 말했다.
또“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설문조사 결과, 89.7%가 출자총액 제한제의 존속과 규제 강화, 또는 대안 마련 뒤 출총제 폐지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도 대기업의 눈치 때문에 (기협중앙회가) 발표도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권 위원장은 또 “삼성그룹이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에버랜드 등 몇 가닥으로 정리돼서 앞으로 지주회사 체제로 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금융 방송 통신 등 규제가 많은 산업분야를 두고 금융감독위원회 방송위원회 정보통신부 등과도 자주 논쟁을 벌였다.
그는 발언들이 몰고 온 파장과 일부 비판들에 대해 “힘들다”고 하소연하면서도, 나름의 소신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공정거래법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 국내에 경쟁법을 소개해 발전시킨 그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있으면서 공정법 이론을 두고 공정위 간부들과 논쟁을 벌었던 일화를 곧잘 소개한다. 공정위장 임기 3년을 두고 “다시 군대에 온 것 같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런 권 위원장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원칙주의자이고 그만큼 순수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다른 경제부처 관계자는 “지나치게 자기이론에 대한 고집이 세고 물러서는 것이 없어서 답답할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발표를 앞두고 있는 순환출자 금지 등의 출총제 대안은 부처간 협의가 끝난 후에도 당정협의 등 수많은 고비를 남겨두고 있는 터여서 권 위원장의 학자적 이상주의가 험로를 헤쳐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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