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 오찬을 함께 해 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권의 정계개편이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가운데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찾아가는 초유의 파격을 선보인 것은 상황에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고도의 정치 행위라는 해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김 전 대통령 역시 북한의 핵 실험 이후 정치적으로 여겨지는 행보를 본격화하고 있던 터여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2시간의 회동에서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이 최근의 핵실험으로 비핵화 선언을 위반한 데 대해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하며, 조만간 재개될 6자회담에서 성과가 나와야 한다는 데 공감을 표시했다. 이 자리에는 노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와 김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 이병완 비서실장 등도 동석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김대중 도서관 전시실을 둘러보며 “김 전 대통령께서 살아온 역정의 삶이 보여주는 감동도 크지만, 치열한 삶의 기록이 잘 모아져 있는 데도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 뒤 전자방명록에 ‘치열한 삶으로 역사의 진보를 이루셨다’고 썼다.
청와대 측은 이날 회동에 대해 “김대중 도서관 전시실 개관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정계개편과 관련) 일절 언급이 없었다”고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등 야권은 물론 열린우리당 일각에서조차 “정계개편 등을 염두에 둔 상징적 행보”라는 분석이 대두되고 있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5일 “정계개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말을 곧이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이미 정치 행위”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우선, 당면한 북핵 문제에 있어서 대북 포용정책 및 남북 평화기조를 유지하려면 여전히 호남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김 전 대통령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란 관측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호남 지지세 회복을 겨냥한 제스처라는 견해도 있다.
나아가 한나라당 일부 의원은 지역구도가 강화된다는 이유로 민주당과의 통합에 반대해 온 노 대통령이 입장을 선회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호남 지분이 상당한 민주당을 빼놓고는 한나라당에 맞설 여권 통합신당 창당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노 대통령도 인정했으나, 곧바로 유턴을 하기는 어려운 만큼 의전적으로 김 전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는 파격을 통해 계기를 만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초선 의원은 “정치 현실 때문에 호남을 등에 업어야 한다는 계산을 한 것”이라며 “말로는 지역구도 극복을 외치면서 결국은 지역으로 회귀하는 이율배반적 언행”이라고 비판했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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