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신의 일로 바쁠 때 모두와 관련된 일로 자신의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공적인 일에 귀중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일은 분명 숭고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이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만은 않다.
● 현대사회에 만연한 정치 혐오증
정치 혐오증이란 비단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만을 향한 것은 아니다. 학교의 학부모회나 아파트 주민회, 교수회나 학생회, 심지어 교회나 사찰의 신도회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어김없이 향해 있다.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 "제 일도 제대로 못하며 설치는 사람"이란 말은 이들을 지칭하는 흔한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과거에는 정치 혐오감은 없었던 듯싶다. 비록 도인들이 세상일에 몰두하는 사람을 비웃기는 했어도 이런 태도가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기회를 얻으면 나아가 뜻을 펴고(정치를 하고), 기회를 못 얻으면 향리에서 제자를 키운다는 것이 우리 선비들의 태도였다.
정치 혐오증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는 19세기에 대의민주주의가 제도화되면서 생겨난 부산물이라는 분석이 있다. 대의민주주의란 대중의 직접 참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민들의 대표자를 통해 공무를 보게 하는 제도이다.
대표자들에 대한 혐오는 그들이 정치판에서 결국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정치권력이 협잡하는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고 금권을 가진 사람들에 매수되어 작용할 때 무력한 개인들은 정치에 등을 돌렸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정치와 경제의 두 축으로 움직이던 세계가 NGO라는 세 번째 축의 등장으로 재조정되고 있다. 또 시민사회의 운동은 국가적 차원만이 아니라 학교나 생활터전과 같은 낮은 곳으로도 점차 내려오고 있다.
작년에 새로 생긴 학교에 큰아이가 입학하게 되어 그 학교의 일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첫 단추를 잘 꿰자 싶은 마음에 학부모회장이 되었고 학교운영위원이 되었다.
촌지가 없고 학부모가 학생들의 자치활동에 영향력을 끼치지 않는 학교가 되도록 처음부터 분명히 선을 긋고 일을 시작했지만 이런저런 사안으로 여의치 않았다. 학교 자체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 큰 요인이었지만, 내부로부터 나온 냉소도 한 몫을 했다.
● 모두 싸잡아 냉소하지는 말아야
공공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심은 그들이 그 일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나 앞장서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공통의 이익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을 가지고 모두에 기여하는 판단을 내리며 수고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다.
특히 생활정치의 차원에서 그렇다. 모두를 싸잡아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사적인 이익에만 몰두하기 때문은 아닐까. 모두가 자기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말이다.
물줄기를 바꾸려는 사람이 없으면 세계는 변화하지 않는다. 공적인 일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으면 혐오스러운 정치는 소멸되지 않는다. 공공의 일은 이제 나의 관심의 몫이다.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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