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손님과 어머니' 음란성을 연구? 큭큭…박형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발행, 281쪽, 1만원
소설이란 무릇 개연성 있는 사건과 엄연한 주제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책을 읽지 않는 게 좋겠다. 황당무계와 엉터리로 점철된 이야기라도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된다면 용인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좀 더 너그러운 독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한 번 심사숙고 해보는 게 좋겠다. 소설이 그저 좀 긴 ‘농담 따먹기’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소설의 끝 간 데를 보고 싶은 호기심 많은 이, 고전적 소설 형식을 전복하고 싶은 급진주의자, 소설이 굳이 무엇을 ‘의미’하지 않아도 좋다는 아량 넓은 독자…. 이런 부류여야 흡족한 마음으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박형서(34)씨가 3년간 쓴 소설들을 묶은 두 번째 소설집 <자정의 픽션> 을 펴냈다. 기괴와 엽기로 우리 문단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이 신세대 작가는 전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문학과지성사ㆍ2003)에서 극단의 상상력과 멜랑콜리를 한데 버무리는 야무진 손맛을 보여준 바 있다. 토끼를> 자정의>
멜랑콜리 대신 유머의 양념을 친 이번 소설들은 표방하는 바가 명백하다. ‘웃기기.’ 박형서에게 주제나 메시지 같은 건 별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너무 허무맹랑한 나머지 상상력이라기보단 공상력이라고 표현해야 좋을 이야기들이 웃지 않곤 배길 수 없는 익살과 재치의 가속페달을 밟으며 죽죽 뻗어나간다.
두피에서 하루 200만 배럴의 머릿기름이 나오는 인간 유전(油田) 성범수를 둘러싸고 만성적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는 대한민국과 세계제국 미국이 치열한 약탈전을 벌이는가 하면<두유전쟁> , ‘유리한 주제의 선정’-‘무시하기’-‘얄밉게 웃기’-‘말 돌리기와 문답법’-‘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기’-‘말허리 자르기’-‘딴청 부리기’ 등의 소제목 아래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기를 쓰는 두 지식인의 적나라한 속내가 ‘큭큭’ 웃음을 유발하며 적나라하게 까발려지기도 한다 <논쟁의 기술> . 논쟁의> 두유전쟁>
문제제기-연구사 검토-본론-결론의 학술논문 형식을 패러디해 유쾌한 재담을 펼쳐보이는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는 그 자체로 폭소탄이다. “마음이 되게 섬세한 문학연구자”(137쪽)인 필자가 <사랑손님과 어머니> 의 꼼꼼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이 작품이 실은 사랑손님과 옥희 사이의 성애를 교묘히 다룬 음란물이었음을 천연덕스럽게 증명하는 이 소설은 학술담론의 공식 언어가 얼마나 유용한 개그의 소재가 될 수 있는지를 입증한다. 사랑손님과>
작가는 구조주의와 형식주의, 신화비평 등을 총동원해 사랑손님과 옥희 사이에 오가는 달걀이 성적 상징임을 주장하면서 “식민지 지식인 주요섭의 엉큼한 내면과 독창적인 세계관”을 밝힌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한 마디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농담을 장장 원고지 100매로 풀어내는 작가의 입담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카프카의 <심문> 을 연상시키는 단편 <진실의 방으로> 에 대해 “때론 죄악과 진실도 창조된다는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이 진지한 소설에서 낯설게 하기와 알레고리를 너무 많이 시도한 것 같아 후회된다. 그러한 고백을 쓰지 않고는 경험의 부족을 감출 수가 없었다”고 썼다. 진실의> 심문>
주제도 없고, 개연성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자신의 황당한 입담을 소설의 새 형식으로 옹립하려는 야심찬 기획이 엿보이는 고백이다.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이런 것도 소설이야?”라고 성낸다면, 작가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답할 듯하다. “자자, 힘 빼고, 그냥 스타일을 즐겨봐. 재밌지 않아?”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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