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공신들이 줄줄이 장관으로 기용되고 있다. 이재정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통일부 장관 내정을 계기로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새삼 도마에 오르고 있다. 청와대는 “효율적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코드 인사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선 공신을 지나치게 챙긴다”는 비판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것도 공직의 꽃인 장관으로 등용, 철저한 경력 관리를 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이재정 통일부 장관 내정자와 이상수 노동부 장관 등 대선자금 문제로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들을 중용하는 것은 국민 여론을 무시하는 인사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노무현 후보가 외롭고 어려웠던 시절 그를 먼저 도운 1등 공신은 바로 천정배 전 법무장관이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대세론’이 퍼져 있던 시절 노 대통령이 계보도 조직도 없이 홀로 경선에 뛰어들었을 때 천 전 장관은 현역의원으로서는 유일하게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2002년 3월16일 광주 경선 이전에 노무현 캠프에 참여한 현역의원은 그가 유일했다.
이번에 통일부 장관에 발탁된 이재정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당시 민주당 현역의원으로 치면 천 전 법무장관에 이어 거의 두 번째로 합류한 인사이다. 2000년 민주당 전국구로 입문한 그는 당초 민주당 경선 후보 중 김근태 현 열린우리당 의장쪽이었지만 김 후보가 제주 경선이 끝난 뒤 사퇴하자 노무현 후보를 돕기 시작했다. 선대위 유세본부장을 맡은 그는 한화그룹으로부터 10억원을 받아 노 후보에게 전달한 혐의로 구속되는 수난을 겼었다. 2심에서 벌금형(3,000만원)을 받아 풀려나긴 했지만 노 대통령은 마음의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신 구하기의 대표적 케이스는 이상수 노동부 장관이다. 대선 당시 민주당 선대위 총무본부장으로 참여했다가 4개 기업으로부터 32억6,000만원을 불법 모금한 혐의로 구속됐다. 한나라당에선 이 장관의 ‘구제’ 사례를 들어 “판결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보궐선거 공천을 하고 낙선하자 마자 바로 노동부 장관에 임명했다”며 보은 인사의 전형이라고 공격한 바 있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계승자로 불리는 유시민 복지부 장관의 경우 2002년 대선을 몇 달 앞두고 정계 진출을 선언, 노 후보를 흔들려는 당내 움직임에 맞서 ‘노무현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 해 11월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 그는 이듬해 신당 창당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2003년 4월 고양 덕양갑 보궐선거에 당선된 데 이어 최근 복지부 장관으로 발탁됨으로써 현재 잠재적 대선주자로까지 위상이 강화됐다.
여성 인사의 경우 복지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16대 국회에서 전국구로 등원한 그는 대선후보 경선 당시 한화갑계로 분류됐으나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로 결정된 뒤 선대위 보건의료특보로 활동하면서 간호계와 여성계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특히 노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의 정무특보를 맡아 선거운동을 지근 거리에서 도왔다.
정동영 전 우리당 의장의 경우 이인제 후보의 사퇴 이후에도 끝까지 판을 깨지 않고 경선주자로 자리를 지켜 노무현 후보의 최종 선출을 위한 조연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은 대선 1년 전인 2001년 12월 문화예술계 인사 100여명과 함께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어 일찌감치 노 후보 돕기에 나섰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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