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친구가 많지 않은 아이였던 나는 매체를 통한 인터뷰나 사적인 자리에서 곧잘 이런 말을 한다. “음식을 끼고 사니까 대인관계가 좋아진다”고. 모자란 솜씨지만 무언가를 뚝딱거려 만들어내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눠 먹으면서, 아쉬운 글솜씨이지만 음식 이야기를 툭툭 털어 글로 쓴 다음 그것을 누군가와 나눠 읽으면서 빈틈뿐이었던 나의 관계사(史)가 쫀쫀해진다.
음식에는 그런 마력이 있다. 사람 몸 속을 헤집고 들어가 서서히 퍼진다는 원리를 생각해보자. 음식 제대로 먹으면 약기운을, 음식 잘 못 먹으면 독기를 퍼뜨릴 수 있는 것이다. 하늘에 붕 뜨던 기분도 메마른 빵조각으로 잡칠 수 있고, 땅으로 꺼져 들던 절망도 정성스러운 국물 한입에 극복할 수 있다. 티격태격했던 연인이 가까워질 수도, 고부 갈등이 부드러워질 수도, 동료 간 단합이 끈끈해질 수도 있다. 음식을 잘 쓰면 말이다.
♡ 어머님표 모둠 젓갈, 밑반찬 일절
지난 주 모 여성지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마침 남동생의 결혼이 얼마 전의 일이었던 터라 ‘결혼’, ‘가정’, ‘가족 간의 관계’와 같은 말들이 자주 등장 했다. 게다가 인터뷰를 담당했던 기자 역시 젊은 주부였기 때문에 나와 죽이 잘 맞아서 이런저런 주부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음식이 주는 혜(惠)가 무어냐고 그녀가 물었고, 나는 ‘유대감(紐帶感)’이라고 답했다. 남편과 내가 식성이 얼마나 잘 맞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이미 본 칼럼에서도 많이 써먹은 소재니까 접어두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예로 들었다.
우리 어머님 김옥연 여사는 모친(남편의 외할머님)이 전주 분이시라 유난히 맛에 강하시다. 깔끔하면서도 깊이가 있는(음식 이라고 감히 한 큐에 단정을 지어본다) 전주 음식을 바탕으로 한 어머님의 음식은 특히 장 다루기, 젓갈 휘두르기, 밑반찬 퍼레이드가 특기다.
나? 나는 친가의 평양 맛, 외가의 서울 맛으로 자란 여자여서 전라도 맛에는 길들여져 있지 않았다. 어머님의 음식을 처음 맛보았던 시절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멸치 육수로 끓인 국, 농도가 진하게 담근 물김치(친정에서 먹던 물김치는 이북식이라 맑고 쨍하다), 갖은 젓갈에 된장으로 맛을 낸 우거지찜 등은 내 입에 낯설었다. 어머님이랑 레써피를 교환하고, 이집 저집 밥 먹으러 많이 다니고, 요리 자문을 받고 하다 보니까 어느새 그 음식들은 내 입에 딱 맞게 되었다면 다들 ‘정치적’ 발언이라 놀리려나?
그 와중에 물론 서로의 노력이 있었다. 일단 우리 어머님은 내 생일이나 남편의 생일, 우리 둘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음식 선물’을 해 주신다. 하나뿐인 며느리 생일에 미역국, 편육, 잡채, 전, 조개젓과 낙지젓, 직접 만든 매실주와 딸기쨈을 싸서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어머님에 비하면 구력이 한참 달리니까 좋은 고기 보면 사가고, 연어나 닭을 써서 만드는 ‘양풍(洋風)’의 음식이나 가끔 해드릴까. 아무튼 오고가는 맛 속에 서로를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젓갈’ 한 가지만 있으면 밥 한 공기를 뚝딱하는 밥 잘 먹는 며느리가 되었다. 여성지 기자에게도 “어머님의 18번 반찬을 자꾸 해달라고, 그 맛 생각나서 밥이 안 먹힌다고 우는 소리를 해보라.” 말했다. 내 실제 이야기다.
♡ 울 엄마의 참게 지짐
평안도 집안의 제일 가는 맏며느리인 울 엄마가 찬바람이 불면 준비하는 별미는 바로 ‘참게 지짐’. 작고 야무진 민물 게를 가문(家門) 극비의 양념에 바짝 졸여 내는 것인데, 조부모님부터 열 살 배기 손자 손녀들까지 기절시켜온 맛이다. 물론 대한민국 누구나 좋아할 맛은 아니다. 민물 게 특유의 꼬릿한 냄새가 있고, 그 냄새에 어울리게 배합한 양념은 처음에는 짭짤하지만 자꾸 먹다보면 단 맛이 있고, 가녀린 다리를 쪽쪽 빨면 나오는 살맛은 넉넉지 않아서 애간장을 태우니까.
어쨌든 이 맛에 나의 친정 식구들은 밥을 두 공기씩 비운다. 갓 결혼한 남동생의 처나 내 남편이 게지짐을 처음 맛보았을 때, 두 사람의 표정을 나는 각각 기억한다. 당황스러워 했던, 그러나 울 엄마의 장기 메뉴이니까 뭐라 말도 못하고 헛젓가락질만 해댔던 모습들. 그러나 지난 주, 남동생과 여러 해 교제하고 우리집 사람이 된 올케와 이미 우리 남매의 큰 형 역할을 해주고 있는 남편이 게지짐 먹는 모습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보다 더 열정적으로 게다리를 빨고, 게살을 발라내고, 그 맛을 흠뻑 음미하는 게 아닌가. 얌전한 올케는 지짐 국물을 위주로 조심스럽게 맛을 보며 밥 한 그릇을 비웠고, 남편은 친정 아빠와 공동 선두를 달리며 밥 두 그릇을 아쉬워했다. 서로의 맛을 닮아가다 보면 사랑이 깊어지는 것인지, 서로 사랑하다 보면 맛이 닮아가는 것인지 신기할 뿐이다. 서로의 맛에, 서로의 ‘집안 간’에 길들여지는 것이 마술 같다.
요리가 하나쯤은 등장해야 하기에 우리 신혼 집들이 때 어머님께 대접했던 명란 파스타를 재현해 보았다. 어머님이 젓갈을 나눠 주시면 아껴먹다가 끄트머리로 만들 수 있는 메뉴다. 기름에 양파, 양송이를 볶다가 명란젓을 간이 맞을 정도로만 넣고 우유나 생크림으로 농도를 맞춘 다음 쪽파와 참기름 한 방울로 마무리해 국수에 비벼내면 완성이다. 우리 올케는 조만간 울 엄마에게 오므라이스를 선보이겠다고 약속했단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맛 대 맛’은 이렇게 연애편지처럼 주고받을 때 효과가 ‘짱’이다.
음식 칼럼집 ‘육감유혹’ 저자 박재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