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국제감식협회 세미나의 화두는 범죄감식이나 분석이 아닌 외화 였다. 최첨단 과학수사기술과 엄청난 집중력을 바탕으로 러닝타임 50분 만에 뚝딱 범죄를 해결하는 드라마 속 길 그리섬(라스베이거스)과 호레이쇼 케인(마이애미) 반장은 각국의 과학수사요원에겐 ‘공공의 적’이다.
송호림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계장은“심지어 미국 요원들도 ‘나 죽네’ 해요. 비현실적인 건 알지만 일반인의 기대수준이 그만큼 높아졌으니 현장에서 일하는 요원만 입장이 난처해졌죠”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우리나라 역시 과학수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가 인기를 끌면서 강력사건 앞엔 ‘과학수사로 잡은…’ 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얼마 전 DNA 분석으로 범인을 증명해 국제적 위상을 높인 서래마을 영아유기 사건은 그 결정판이다.
하지만 과학수사에 대한 인식은 아직 낮다. 분석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무수한 추측과 오보가 난무한다. 조급증과 이해부족이 낳은 결과다. 그 숱한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과학수사요원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전부터 늘 해왔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4일 ‘과학수사의 날’(58주년)을 앞두고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현실을 짚어본다.
●과학수사는 ‘기다림의 미학’
지난해 8월 대전의 한 가정집에서 불이 나 일가족 4명(엄마와 3형제)이 숨졌다. 퇴근한 남편은 “불이 뜨거워 구하지 못했다”며 절규 반, 흐느낌 반이었다. 몇몇 신문과 방송은 다음날 남편의 애타는 사연을 소개했다. 이 때문에 남편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10일 뒤 이상한 부검결과가 나왔다. 피부엔 물집이 없었고 기도엔 그을림도 없었다. 불이 나기 전 일가족은 이미 숨진 상태였던 것이다. 사인은 청산염에 의한 독살과 교살(막내)이었다. 범인은 보험금을 노린 남편이었다.
과학수사의 쾌거였다. 하지만 남편의 행동만 보고 섣부른 추측을 했다 부검조차 못할 뻔했다. 그러나 현장감식 보고서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한 부검의는 유족이 거부하는 부검을 강행했다. 부검을 맡았던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부장은 “가족을 잃은 남편을 두 번 울린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부검을 하지 않았다면 일가족 4명은 억울한 주검으로 남았을 것”이라며 “무리한 추정은 수사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더 이상 ‘살인의 추억’은 없다
1986년 9월~91년 4월 경기 화성시는 악몽의 도시였다. 10차례나 이어진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미제사건(4월2일 공소시효 만료)이 됐다.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역량이 총동원됐지만 뼈아픈 실패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경찰은 무려 4만116명의 지문을 대조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8차 사건(89년 7월)이다. 당시 국과수와 경찰은 현장에서 수거한 남자 음모 8개를 분석해 일반인에겐 없는 티타늄을 검출, 용의자 60여명과 대조한 뒤 범인을 잡았다.
하지만 다른 사건들은 모든 게 엉망이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 처럼 현장은 뒤죽박죽이 되고, 점쟁이를 찾아가 범인의 정체를 묻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발로 뛰는 수사는 한계에 부딪혔다. 역설적이만 그 실패의 추억이 과학수사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살인의>
마지막 사건(91년 4월) 4개월 뒤 국과수엔 DNA분석실이 신설됐다. DNA분석은 삼풍백화점 참사(95년), 대구지하철 참사(2003년) 등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국과수 법의학팀은 “영아유기 사건 때 용의자가 혐의를 부인하는데도 코방귀를 뀔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사건해결을 통해 얻은 자신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0년 서울경찰청엔 국내 첫 프로파일러 권일용(42) 경위를 주축으로 범죄분석(프로파일링)팀이 꾸려졌다. 지푸라기도 잡듯 무속의 힘을 빌었던 화성연쇄살인과 달리 이제 과학적인 방법으로 범인의 심리를 분석하게 됐다. 국내 프로파일링은 유영철 사건과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을 통해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CSI에도 없는 신기술
에 뒤지지 않는 신기술도 많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신경택 경장이 개발한 콤팩트형 지문 분말과 휴대용 형광물질 인식기 등은 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낳은 산물이다. 박희찬 경위의 ‘지문 고온처리기술’은 동남아시아 지진해일 때 외국에서 배워갈 정도였다.
또 ‘다기능 현장증거 분석실’이 이달 말 완공될 예정이고, 교통단속카메라와 차량판독시스템 등을 이용해 범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하는 리얼타임창출시스템도 개발 중이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 "한국판 CSI 女風이 이끈다"/ 프로파일러 70% 등 두각
“사건현장에선 마음 약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과학수사 분야에 여풍(女風)이 불고있다. 난도질 당한 시신을 꼼꼼하게 검사하는 검시관, 흉악한 연쇄살인범의 머리 속까지 들어가 엽기심리를 파헤치는 범죄분석요원(프로파일러) 등은 여성이 남성보다 많다.
경찰청이 지난해와 올해 뽑은 프로파일러(1, 2기) 30명 중 21명(70%)이 여성이다. 비슷한 시기에 선발한 검시관(1, 2기) 역시 여성이 24명으로 남성(20명)보다 많다. 두 분야 모두 과학수사 역량 강화를 위해 경찰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여성 프로파일러와 검시관은 “끔찍한 범죄의 최전선에서 남녀의 역할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프로파일러 김경옥(30) 경장은 “강력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라 오히려 이해가 빠르다”고 했고, 검시관 이현정(31)씨는 “억울하게 당한 희생자를 생각하다 보면 솜털만한 단서에도 온 신경을 쏟게 된다”고 말했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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