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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5>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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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35>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

입력
2006.10.3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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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의식의 분비선이고 의식을 존재가 구속한다면, 언어에 존재의 흔적이, 다시 말해 화자를 얽매는 사회조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의 자연언어 내부가 동질적이지 않고 여러 수준의 변이형(방언)들로 버무려지는 것은 그래서다. 그렇다고 자연언어 화자들이 자신의 사회조건을 고스란히 제 언어에 반영하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는 아니다. 그들은 언어를 부리면서 제 사회조건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창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제 불리한 사회조건의 흔적을 제 언어에서 지워내고 유리한 사회조건을 제 언어에서 과장한다. 경제학자 제임스 듀젠베리가 개인들의 장기적 소비함수를 관찰하며 발견한 ‘전시효과’(과시효과: demonstration effect)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계급들의 취향을 관찰하며 찾아낸 ‘구별짓기’(distinction)는 언어 수준에서도 발현되고 실천된다.

한 개인의 소비지출 크기는 그 개인의 절대소득 수준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둘레의 소비수준이나 그 개인의 과거 최고 소득에 달려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 강남의 좁은 아파트에 사는, 한 때는 잘 나갔던 프티부르주아가 강북의 같은 계급 사람보다 씀씀이가 크게 되는 것이 그 예다. 또 한 개인의 취향은 그 개인의 소질이나 내적 충동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 개인이 소속감을 느끼는 계급의 표지인 경우도 많다.

상류층은 축구보다는 승마를, 텔레비전 드라마보다는 클래식 오페라를, 맥주보다는 그럴싸한 빈티지와인을 더 즐긴다. 속으론 승마보다 축구에 더 끌려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별 볼 일 없는 민중계급의 장삼이사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계기로 승마가 대중화한다면, 상류층은 자신을 대중으로부터 구별해줄 수 있는 다른 스포츠를 악착같이 찾아내 자신이 대중에 속하지 않는다는 티를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상류층은 아니지만 상류층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은 상류층의 표지가 붙은 취향을 부러 실천함으로써 허위의식을 통한 자족감을 누린다. 그러니까 구별짓기는 늘 차이 지우기를 ‘부대사건’(附帶事件)으로 거느린다.

언어 사용도 마찬가지다. 최상류층 사람들이 그들만의 방언을 쓰며 계급적 동질감을 확인하는 한편 여타 계급으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는 경우가 있다. 이 시리즈의 두 번째 글 ‘표준어의 폭력’(3월15일자)에서 소개한 프랑스 상류층의 방언 NAP는 그런 구별짓기를 겨냥한 계급방언의 전형이다. 한국어에는 이런 계급방언이 또렷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어 화자들 역시, 계급이라는 테두리 안팎에서, 그것을 가로지르며, 언어를 통한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를 다양하게 실천하고 있다. 불리한(불리하다고 판단된) 사회조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언어적 실천은 유리한(유리하다고 판단된) 사회조건의 흔적을 내보이기 위한 언어적 실천과 부단히 경합하고 결합한다.

한국어에서 가장 위세가 큰 방언은 표준어의 근간을 이루는 서울-경기방언이다. 그래서 다른 방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은 되도록 서울말에 동화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런 차이 지우기의 실천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해라체의 의문형 종결어미 ‘-니’는 전형적 서울방언으로 간주된다. 주류 동남방언의 경우, 이 ‘-니’는 의문대명사나 의문부사를 지닌 의문문에서는 ‘-노’로, 의문사를 지니지 않은 의문문에서는 ‘-나’로 실현된다.

그리고 서남방언을 포함한 대부분의 다른 방언들에선, 서울방언에도 뉘앙스를 달리해 존재하는 ‘-냐’로 실현되는 듯하다. 그런데 서울방언 이외의 방언 화자들이 서울방언의 위세에 끌려 ‘-니’를 사용해봐야, 이 차이 지우기는 대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서울말을 서울말처럼 들리게 하는 결정적 특질은 서울말만의 독특한 형태소에 있다기보다 밋밋하기 짝이 없는 억양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언 억양을 유지한 채 발설된 “너 나 사랑하니?”라는 물음에는 그 메시지를 설핏 덮어버리는 부조화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더구나 이 말이 남성화자의 입에서 나왔다면 그 부조화는 거의 기괴하다 할 수준에까지 이른다. 서울말에서조차 의문형 종결어미 ‘-니’는 여성어나 어린이 말의 감촉을 짙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자라서는, ‘-니’를 버리고 ‘-냐’를 쓰는 경향이 압도적이다. 물론 어린아이나 여성과 얘기할 땐 남자들도 ‘-니’를 더러 쓰지만, 이것은 정겨움의 표시로 제 말투를 상대방 말투에 맞춘 일종의 배려행위일 따름이다. 그러니, 다 큰 남자가 억센 방언 억양을 흩뜨리며 “너 나 사랑하니?”라고 말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는 서울 여자는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보아도 좋다.

여타 방언 화자들의 표준어 사용이 차이 지우기의 실천이라면, 서울내기들의 표준어 일탈은 구별짓기의 실천이다. 표준어 사용이 보편화하면 거기서 위세의 상징이 제거돼 버리겠지만, 서울내기들은 이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경우에도, 표준어에 포섭되지 못한 서울말을 꿋꿋이 쓰며 다른 지방 출신 화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어에서야 표준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이 실천은 주로 구어에서 이뤄진다.

예컨대 “그 기집애두 아프겠지만, 나두 아퍼. 그러길래 내가 이 혼사 안 된댔잖어”는, 표준어로라면, “그 계집애도 아프겠지만, 나도 아파. 그러기에 내가 이 혼사 안 된댔잖아”가 돼야겠지만, 제 입에 익숙한 말투를 굳이 표준어로 바꾸는 서울사람은 없을 테다. 주로 구어 수준에서 서울말의 일부분은 표준어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서울방언 화자들은 표준어에 동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그들 생각에 서울방언은 표준어보다 더 큰 위세를 지닌 방언, 표준어 위의 ‘명품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들유들하게도 ‘무릎이’를 (/무르피/가 아니라) /무르비/로 읽고, ‘부엌에서’를 (/부어케서/가 아니라) /부어게서/로 읽는다.

지식인들은 더러 추상적 어휘로 이뤄진 번역 말투를 대화에서까지 부림으로써 제 교양을 뽐낸다. “아는 게 돈인 세상이야”를 “지식의 자본화가 가속화하는 시대야”로 뒤치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를 “일상의 문화적 물질대사를 통해 축적된 습속의 각질을 깨고 우아한 가능세계로 탈주하는 건 실존의 개연적 사태 너머에 있어”로 비비꼬며, 이들은 제 알량한 허위의식을 만족시킨다. 이런 실천은 더러 역겹고 자주 코믹하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구별짓기는, 언어를 통하든 소비지출이나 취향의 실천을 통하든, ‘실존의 개연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위세가 큰 직업이랄 순 없는 기자들도 (잠재)의식적으로 언어를 통한 구별짓기를 시도한다. 이제 젊은 기자들은 잘 안 쓰는 추세라지만, 아직도 언론계에는 (아마도 일제 시대 때부터 전수된) 일본어 용어들이 남아있다. 사스마리(사쓰마와리: 경찰기자), 마와리(담당 구역을 한 바퀴 돎), 하리꼬미(잠복근무), 도꾸다니(단독 보도, 특종. 바른 발음은 도꾸다네), 우라까이(남의 기사를 베껴쓰기.

‘뒤집다’를 뜻하는 ‘우라가에스’에서 온 듯), 도리(문서절취), 가께모찌(두 군데 이상 출입처를 겹치기로 담당함), 나와바리(출입처), 간지(분위기, 기분, 느낌) 같은 말들이 그 예다. 영어 ‘캡틴’(captain)의 준말일 캡(사건 팀장을 맡는 시경 출입 기자)도 기자 사회의 방언이랄 수 있다. 이런 말들이 쉬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 하나는 기자들이 이런 ‘은어’를 사용함으로써 제 직업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법하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의 문건들을 어지럽히던 암호성(暗號性) 약자 은어들이나 요즈음 인터넷에 흩날리는 젊은 세대의 속어들도 마찬가지다. 이 은어들과 속어들은, NAP나 서울말이나 다른 여러 형태의 방언들처럼, 바깥 사회로부터 그 사용자들을 구별하고 이 사회방언권 내부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어떤 말들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자리를 반영하고 표출한다. 한국 사회에서 ‘친북 좌파’나 ‘빨갱이’라는 말은 이 말들을 사용하는 사람이 극단적 보수주의자임을 드러내고, ‘페미’(여성주의자를 뜻하는 ‘페미니스트’의 준말이지만, 극단적 여성우월주의자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짙다)라는 말은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극단적 남성우월주의자, 곧 마초임을 드러낸다.

반면에 ‘수구 냉전 세력’이나 ‘반동세력’이라는 말은 이 말을 쓰는 사람이 리버럴이거나 좌파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 ‘깜둥이’ ‘흰둥이’ ‘짱꼴라’ ‘쪽바리’ 같은 말들은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제 인종주의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특이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깜둥이’처럼 정치적 사회적으로 민감한 금기어들을 다른 말로 에둘러 표현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는 1990년대 들어 미국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본디 PC는 보수주의자들이 비아냥거림의 맥락에서 만든 말이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내 이 말을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여 제 정체성의 일부로 삼았다. PC의 지지자들은 ‘깜둥이’나 ‘흑인’이라는 말 대신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정신박약’이라는 말을 대체하기 위해 ‘학습곤란’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한국어에서 ‘식모’가 ‘가정부’로, ‘파출부’가 ‘가사도우미’로, ‘운전사’가 ‘기사’로, ‘차장’이 ‘안내양’으로, ‘보험외판원’이 ‘보험설계사’나 ‘생활설계사’로, ‘청소부’가 ‘환경미화원’으로, ‘때밀이’가 ‘피부청결사’로, ‘간호원’이 ‘간호사’로, ‘광부’가 ‘광원’으로 바뀐 것도 PC의 정치언어학에 따?것이랄 수 있다.

PC는 어떤 이름에서 편견을 제거하려는 고귀한 노력이지만, 그것이 늘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본디이름에 들러붙어 있던 부정적 이미지들이 이내 새 이름으로 옮겨 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PC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들만이 아니다. 가장 급진적인 사람들도 PC의 반대자가 될 수 있다.

이들 생각에, 언어가 반영하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공정함 자체를 바로잡지 않는 한, 말을 다듬고 바꾸는 것은 큰 뜻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견해다. 며느리밑씻개를 장미라 부른다 해서 며느리밑씻개의 생김새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한편, 편견을 드러내는 언어의 사용 자체가 불평등과 불의를 고착시키고 강화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현실과 언어가 맺는 관계는 이렇게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다. 그저, 한 개인의 사회적 자아는 그 개인의 언어에 깊은 자국을 내게 마련이라는 점만 다시 지적하기로 하자.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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