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헌법으로 암담하던 1979년, 국민의 이목이 쏠린 영수회담이 열렸다. 묘하게도 당시 세간의 관심은 '정권'이라는 말에 집중돼 있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현 정부'라는 말 대신 '현 정권'이라는 말을 사용할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김 총재는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YH사건 때는 '미국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지지를 철회하라'고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선언으로 김 총재는 국회의원직을 박탈 당했다.
'정권'은 정부를 폄하하거나 정통성을 부인하는 표현이다. 우리 신문에서 특이한 현상은 독재체제에서는 보이지 않던 '정권'이라는 표현이, 민주주의가 진행될수록 눈에 띄기 시작하는 점이다.
특히 참여정부 들어 신문 오피니언 면에 하루가 멀다고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한 예로 광복절 관련 사설을 본다. '우리의 광복과 건국을 정통성으로 자부한다'는 이 사설은 꼬박꼬박 '노무현 정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아 출범한 노무현 정부를 '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정통성과 일관성을 부인하는 모순이다.
● 일본인도 나서 우리 모멸
현 정부를 비판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이 정부는 기대한 만큼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겸손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정부가 정당한 선거에 의해 탄생한 한, 비판은 하더라도 엄정하고 객관적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거 결과를 존중하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다음 선거를 통해 심판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독재 정부 아래서는 '정부'라고 호칭하고, 민주 정부에는 '정권'이라고 부르는 게 고작 언론의 자유였던가? 이제 이 정부가 중반을 지났으니 더 기승을 부릴 듯하다.
이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최근 번역ㆍ출판된 일본책 때문이기도 하다. 니시오카 쓰도무라는 일본인은 제목부터 본문까지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이라고 깎아 내리고 있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국가적 모멸이다.
글마다 '노무현 정권' 하는 한국의 이른바 지식인들도 '부시 정권', '아베 정권'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아니 '노무현 정권'이라고 부르는 사람일수록 '부시 정권' '아베 정권'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면, 남은 우리를 더 싸잡아 얕본다.
'좌파 정부'도 단골로 악용되는 왜곡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 좌파정부 논란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정부의 분배정책은 미국 영국 스웨덴 등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최근의 손호철칼럼 역시 현 정부를 개혁적 보수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등이 진보세력이고, 노무현 정부는 자유주의세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치학자들의 엄정한 정의에도 아랑곳없이, 그렇게 부르는 것 또한 모함에 불과하다.
● 객관적 正名이 언론 정도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희극이 절정을 이룬다. 인터넷에 실린 한 편의 글이 그 코미디성을 명료하게 드러내 준다. <노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 어느 쪽에든 매몰되지 않고 문제에 따라 적절히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말한 용어가 '좌파 신자유주의 정부'란 해괴망측한 말이다.< p>노>
충분히 조크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청와대도 '좌파 신자유주의'란 조크였다고 밝혔으나, '노무현 까대기'에 여념이 없는 정당과 단체, 매체들이 선정적인 방법으로 몰아붙였다.
또한 사설이니 평론이니 하는 낭비적 글쓰기를 하는 선동가들은 말의 맥락을 완전히 생략하고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에만 집중하여 노 대통령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색깔론에 의지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시대착오적 언어가 도처에 깔려 있다. 그런 말과 문장에서 드러나는 편견과 선입견이 바로 왜곡의 증거다. 보도용어의 자존심을 지키고 정통성을 찾는 것, 그 정명(正名)이 언론의 정도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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