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지하철 대방역 앞을 지나다 헌혈소를 봤다. 오랜만이다. 전에는 거리 곳곳에 헌혈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도 인연인데 헌혈이나 하고 갈까 봐.” “관 둬.” 친구는 심드렁히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젠 헌혈하기에 내 피는 그리 젊지도 맑지도 않구나,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스무 살 때 한 1년 열심히 헌혈을 했다. 첫 헌혈 장소는 서대문 적십자병원이었다. 겁먹은 채 간이침대에 누웠고, 튜브를 통해 내 몸에서 투명한 주머니 속으로 피가 흘러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머리가 몽롱하면서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헌혈이 끝나자 간호사가 단팥빵과 우유와 헌혈증서와 배지를 줬다. 나는 특별한 경험을 한 듯 조금 흥분해서 햇살 일렁이는 적십자병원 마당을 걸어 나왔다. 그날 저녁, 루비처럼 예쁜 핏방울 모양의 배지를 아버지께 수줍게 보여 드리며 헌혈을 자랑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다! 칭찬은 못하실망정 헌혈했다고 야단을 치다니. 실망했지만, 자식이 자해한 꼴을 본 것 같았을 아버지 심정을 알 듯도 했다. 그 뒤 나는 중독된 듯 헌혈했다. 보름 만에 또 갔다가 헌혈을 거부당한 적도 있었다.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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