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미술작가는 뭔가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을 만든다. 설령 쓰레기 같은 것으로 작업을 해도 그 결과는 의미심장하거나 근사해 보이도록.
이주요(35)는 그런 일반적 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는 버려진 각목이나 비닐, 스티로폼, 장판 따위의 볼품없는 것들로 작품을 만든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주변적인 것들, 그 ‘최소한의 재료’로 작업을 하다 만 듯 허술하게 만들어 끝까지 주변적인 것으로 남는 그의 작품은, 애써 무엇을 주장하는 법도 없어서 그저 어설프고 썰렁하고 쓸데없는 짓처럼 보인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다 올 봄에 돌아온 그가 전시기획자 김선정의 ‘사무소’(서울 종로구 화동)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다. 일반 주택을 개조한 이 곳은 말 그대로 사무소다. 사무실 한 칸을 치우고 작품을 놓았는데, 그 모양새가 곧 버릴 물건을 잠시 보관한 골방 같다.
오가던 사람들이 대문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안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무슨 전시해요?” “네.” “그런데, 작품이 어디 있어요?” “저기 안쪽, 검은 방이요.” “물건들이 쌓여있던데?” “그게 작품이에요.” “네? 어, 좀 난해하네.”
지난 3년 간 네덜란드에서 한 작업을 집약한 이번 전시는 아닌 게 아니라 보관이 마땅치 않아 버리려던 것을 배로 실어와 쇼핑용 카트에 담은 채 보여주고 있다. 둘둘 말아 세운 리놀륨 장판, 비닐을 씌운 정체불명의 발광체, 헝겊으로 덮은 잡동사니 등 5개의 카트에 담긴 작품들은 전혀 작품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충 담고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듯이 보이는 이 장면을 위해 작가는 일주일이나 밤샘을 하며 고민을 했다고 한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 <한강에 누워> <스몰> <박이소 오마주> 로 구성돼 있다. 박이소> 스몰> 한강에>
<스몰> 은 작고 마른 몸에 약하고 예민한 작가가 크고 빠르고 강한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을 설치와 드로잉으로 보여준다. 그는 자신처럼 키 작은 사람을 위해 장대 끝에 물뿌리개, 곤충채집망처럼 보이는 햇빛가리개 등 소박하고 느리고 헐렁하고 개인적인 것들을 매달아 ‘대항’ 한다. 그는 이런 방식을 ‘겸손한 저항’이라 부른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어떤 시스템에도 제대로 저항할 수 없는 스스로의 약함을 인식했어요. 그래서 작가로서 작업 속에서 행하는 저항이 있다면, 잘 못하는 것을 뻔뻔스럽게 드러내거나 묵묵부답인 일상을 사소하게 비트는, 즉 저항하지 않으면서 계속 쭝얼쭝얼하는 거겠죠.” 스몰>
<한강에 누워> 는 돈을 벌지 않는 남녀가 한강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다 추위가 닥치자 갈 곳이 없어 헤어지는 내용의 비디오와 드로잉 작업이다. 작가는 이들을 위해 한강의 버려진 곳에 은밀한 공간을 꾸며냈다. ‘키스와 그 밖의 일’을 할 수 있게 후미진 공중전화 부스에 세운 스티로폼 가림막, 몸을 녹일 수 있게 촛불로 깡통이나 돌 데우기 등 초라한 장치들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너를 위해 이렇게 준비했으니 다시 돌아오라”는 메시지도. 작가가 6개월 간 만난 그 데이트 상대는 반자본주의자였다고 한다. 멀쩡하고 똑똑하지만, 자기 같은 사람이 일을 안 하고 사회에 아무 것도 보태지 않는 것이 궁극적인 저항이라고 믿는. ‘겸손한 저항’보다 좀 더 센 저항이다. 한강에>
<박이소 오마주> 는 2004년 세상을 떠난 작가 박이소에 대한 재해석이다. <미확인 발광물체> <블랙홀 의자> <북두팔성> 등 박이소의 작업을 ‘왜 그렇게 했을까,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하고 이주요 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동료 겸 조수로 3년 간 박이소를 지켜본 작가는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썰렁함, 위트, 진지함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북두팔성> 블랙홀> 미확인> 박이소>
그럴 듯해 보이기를 거부하는 이주요의 이번 전시는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겸손한 저항’의 낮은 외침을 들으려면, 일반적인 개념이나 정의에 갇히지 말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 순간, 미술을 감지하는 새로운 더듬이가 돋을 것이다. 전시는 11월 5일까지. (02)739-7067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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