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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햇볕정책이 죄가 있냐고?

입력
2006.10.2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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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의 충격파로 모두가 헤매는 와중에 오직 분명하고도 일관된 목소리를 내는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뿐이다. 연일 햇볕정책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그에게선 예전 반독재투쟁 때와 같은 뜨거운 열정마저 묻어난다. 분연히 노구를 일으킨 그의 심정은 이 한 마디에 녹아 있다. "포용정책이 죄가 있는가?"

사실 '화해·협력으로 북의 개혁·개방을 유도해 평화통일의 기반을 넓힌다'는 포용정책의 순정한 의도야 무슨 죄가 있을까. 하지만 죄는 의도가 아닌 그 행위의 결과로 성립하는 것이다. '햇볕정책=핵 개발'의 등식은 증명할 수 없으나 아니라는 증거 또한 대기 어려운 현실에서 "무슨 죄가 있느냐"는 식의 논법부터 온당치 않다.

그는 무죄론의 근거로 "포용정책은 긴장을 완화했을 뿐 악화시킨 적이 없다"는 것을 든다. 물론 핵 사태를 가벼이 보는 게 아니라, 긴장국면의 책임을 미국에 돌림으로써 포용정책의 죄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도 햇볕정책을 수긍하던 그의 재임기는 평화로웠을까?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볼멘 반문

소떼와 비료, 곡물 따위로 북한에 폭포수처럼 햇살을 쪼이던 그의 취임 첫 해 강릉, 속초, 여수에 북한 잠수정과 무장간첩이 연속 침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년만 지나면 북한이 바뀔 것'이라는 장담이 무색하게 이듬해엔 휴전 후 처음으로 남북 군사력이 본격 충돌하는 연평해전이 발생했고, 2002년에는 아군병사들이 다수 희생되는 대규모 서해교전이 발발했다. 6·15 남북공동성명의 '한반도 긴장완화', '냉전종식' 따위 문구들은 정권이 끝나기도 전에 허망한 수사가 됐다.

그는 또 "전에는 판문점에서 총 몇 방 쏘면 피난준비했으나 이제는 핵에도 끄떡 안 한다"고 했다. 과거 극소수의 사재기 호들갑은 있었지만 국민이 피난준비를 했다는 것부터 과장일 뿐더러, 이번에 국민적 동요가 크지 않은 것은 햇볕정책 속에서 북한의 온갖 도발적 언행을 견디며 키워진 내성 때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누군가 오죽하면 우리 처지를 서서히 데워지는 물 속에서 삶아지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는 개구리로 표현했을까.

그렇더라도 포용정책은 남북관계가 매양 그 모양인 상태에서 뭔가 다른 접근법으로 시도할 가치가 있는 정책이었다. 문제는 방향과 의도를 다 까발리고 시작한 데 있었다.

화투판에서도 제 패는 감춰야 하거늘 "네 옷을 홀랑 벗겨 버리겠다"고 소리치며 나섰으니 게임에서 이기는 게 이상한 것이다. 이 쪽의 수를 뻔히 아는 상대야 쪄 죽더라도 극구 옷깃을 부여잡을 테니 결국 옷을 벗게 된 건 우리였다.

미국 책임론 또한 일정 부분 타당하지만 너무 강조하는 것은 비겁하다. 이는 뒤집으면 그렇게 퍼 주고도 대북관계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것일 뿐이다.

● 교조적 포용정책 고집이 문제

다른 모든 정책들처럼 선택적이며 절충 가능한 포용정책을 마치 절대적이고 유일한 정책인 양 떠받든 것도 잘못됐다. 대개의 정책 실패는 원칙에 집착해 유연성을 상실하는 데서 비롯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는 식의 반박은 유치하고도 기만적인 이분법이다. 여론조사들의 결과도 그렇듯 다수 국민의 뜻은 결코 포용정책을 전면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원칙은 견지하되 상황에 따른 적절한 완급조절로 북한을 관리 가능한 체제로 끌어들이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수정 보완론이다.

다른 정치인들은 놓아두고 유독 김 전 대통령의 말을 시비하는 것은 대북정책에 관한 그의 높은 식견과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의 강경한 포용정책 옹호발언 이후 입장을 바꾼 노무현 대통령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정치권의 모습이 여전한 그의 힘을 입증한다.

솔직히 요즘 김 전 대통령의 언행에선 햇볕정책 저작권자로서의 불쾌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설사 국가 위기상황을 타개하려는 충정이라 해도 지금의 난잡한 정치상황에선 선의도 곡해받기 십상이다. 자중하는 것이 옳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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