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 토니 모리슨 지음ㆍ김선형 옮김 / 들녘 발행, 316쪽, 1만2,000원
“사람들은 내가 언제나 사랑에 대해 글을 쓴다고 말한다. 항상, 늘 사랑 타령이라고.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꼭 그런 건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배신에 대해서 쓰고 있다. 사랑은 날씨다. 배신은 날씨를 찢어놓고 폭로하는 번갯불이다.”(머리말ㆍ7쪽)
달콤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듯 언제나 쓰디쓴 사랑만을 그려온 토니 모리슨의 소설 <러브> (2003)가 번역돼 나왔다. 1993년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월계관의 무게에 짓눌린 듯 둔중한 몸놀림을 보여온 작가가 오랜만에 특유의 유려하고도 날렵한 재즈리듬을 서사 안에 복원한 작품이다. 러브>
<러브> 는 50년간 서로를 사랑하고 증오한 두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끝내 사랑일 수 없게 하는, 배신 권하는 마이너리티 사회의 비극성을 제시한다. 열한 살 소녀 히드와 크리스틴은 둘도 없는 단짝친구. 그러나 호텔 경영자인 크리스틴의 할아버지 코지가 히드를 어린 신부로 맞이하면서 두 소녀의 삶은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빈민가 출신인 히드는 코지의 아내로 간택된 이후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틴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것을 히드에게 모두 빼앗긴 크리스틴은 천덕꾸러기가 돼 오로지 히드에 대한 증오로 삶을 지탱해 간다. 러브>
소설은 어느 추운 겨울날, 소년원에서 갓 출소한 소녀 주니어가 코지의 저택을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코지가 죽은 후 20여년간 히드와 크리스틴은 각자의 공간을 차지한 채 서로 죽기만을 바라며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히드가 코지의 유언장을 조작하기 위해 주니어를 고용하면서 이들의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에 균열이 생기고, 주니어는 이들의 관계를 교묘히 이용해 재산을 가로채려 한다.
작가는 <러브> 에서도 흑인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만 묶일 수 없는 흑인사회의 계급에 대해 섬세한 분화의 촉수를 들이댄다. 흑인이라는 것, 게다가 여자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어린 아이였다는 것. 이 겹겹의 마이너리티는 열한 살에 인생이 뒤바뀐 두 여자의 50년 비극을 만들어낸 비옥한 토양이었다. 코지는 경찰의 끄나풀 노릇을 하며 동족의 피를 밟고 중흥한 아버지를 증오하며 아버지와 다른 삶을 도모하지만, 가계에 흐르는 더러운 유전자를 세탁하기 위해 열한 살짜리 소녀를 욕망하는 더 큰 폭력을 저지른다. 러브>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서 흑인 부르주아 남성은 언제나 자기 안에 영혼을 파먹는 좀벌레를 품고 있다. 백인 세계에서 흑인이 성공을 거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약자 그룹 안에서도 작동하는 가부장적 권력이 어떻게 흑인여성을 이중으로 착취하는지 그녀의 소설은 가차없이 폭로한다. 유년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한 두 여자의 50년 삶은 그 비열한 세계의 단면도다.
어째서 늘 흑인여성의 문제만 다루느냐는 질문에 토니 모리슨은 “그럼 나마저 주류인 백인 남성 작가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흑인여성의 세계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세계이고, 흑인여성의 문제는 결코 편협하거나 사사로운 주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즈> <빌러브드> <가장 푸른 눈> 등으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녀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미국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가장> 빌러브드> 재즈>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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