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시절 미묘한 떨림 그 사소한 기억 속으로에쿠니 가오리 지음ㆍ김난주 옮김 / 소담 발행, 184쪽, 9,000원
‘감성작가’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가 사춘기 기억이 증발한 자리에 찬란한 ‘여고시절의 감수성’을 수놓는다.
여섯편의 옴니버스 단편으로 이루어진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는 <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도쿄타워> 등을 통해 단아하고 세련된 글쓰기로 많은 한국 팬을 확보한 그의 첫번째 성장소설이다. 도쿄타워> 냉정과> 언젠가>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교실에서 생활하는 열 명의 여고생.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하는 그들이지만 각자 짊어진 나이 열 일곱의 무게와 질감은 다르다. 만원 지하철 속 여자 성추행범에게 묘한 동성애적 호기심을 느끼면서 어쩌면 자신도 불감증에 걸린 지 모른다고 여기는 모범생 기쿠코도 있고<손가락> , 뚱뚱한 몸에 콤플렉스를 가진 탓에 자신의 외모를 깔보는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고칼로리의 사탕을 듬뿍 안겨주며 ‘사탕 장부’를 기록하는 카나도 있다 <사탕일기> . 에미와 모에코는 화장실도 등굣길도, 뭐든 함께 했던 단짝이었지만 에미의 정신병 증세 탓에 차츰 사이가 멀어지기도 한다. <초록 고양이>초록> 사탕일기> 손가락>
에쿠니 가오리는, 작은 장난감 블록을 촘촘하게 조립해 커다란 조형물을 만들 듯 군살을 쪽 뺀 간결하고도 담백한 단문으로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될’ 일상의 미묘한 떨림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에쿠니 가오리가 끼워 맞춘 오밀조밀한 감성세계에는 거칠거나 험악한 이물질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인다. 해서 여섯 단편속 여고생 열 명의 감수성은 반항이나 일탈로 치닫는 질풍노도의 격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소하고 나른해 보일 수도 있을 만큼 부드럽고 함초롬한 감수성이다.
그러나 그 아름답던 시절이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 다음, 먼지 쌓인 ‘사탕일기’를 발견하거나 외모가 확 바뀐 ‘여고 단짝’을 마주친다 해도, 그 낯선 과거의 자화상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조할 수 밖에 없다. 서글픈 일이지만, 이제는 희미한 성장통의 그 기억마저도 머지않아 증발해버릴 것이다. 그래서 망각의 굴레는 더 안타깝고, 다시 못 올 감수성의 시대는 더 찬란하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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